2018년 8월 4일, 백열두 번째 날
처음엔 쑤저우가 싫었다. 4월의 쑤저우는 추웠고, 미세먼지 가득했고, 그래서 밖으로 나가기가 싫었는데, 어쩐 일인지 우리 집 안은 집 밖보다 더 추워서, 어느 곳에 있든 나는 얼마쯤 불행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이곳에 도착한 다음날 바로 집을 구했고, 그로부터 이틀 후에 바로 일을 시작했다. 지금도 일은 많지만 적응이 되었고, 그래서 개인적인 시간도 낼 만하지만, 그때는 너무나 정신이 없어서 잠을 자고 밥을 먹는 시간 빼고는 하루 종일 일에만 매달려야 했다.
어디에 가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 실은 나도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밖에 나가면 hotel이라든지 station이라든지, 더 이상은 영어라고 하기도 힘들 만큼 널리 사용되고 있는 단어들조차도 통하지 않아서, 아무리
‘중국인이 영어를 못하는 건 이상한 게 아니야. 중국에 살면서 중국어를 못하는 내가 문제인 거야.’
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답답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친절한 중국인들도 많이 만났지만, 그들이 초록불에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나를 보고도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은 채 차를 몰고 내게로 돌진할 때면,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걸 뻔히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 사이사이로 끼어들 때면, 그래서 내가 먼저 왔다고 말을 해도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듯 나를 쳐다볼 때면 때때로 그들에게 분노하는 마음이 일었다. 사람들은 자꾸 소리를 질렀고, 아무렇지 않게 내 공간을 침범했고, 그래서 어디서도 평화를 찾을 수가 없어서, 나는 쑤저우에서 행복하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쑤저우에서 처음으로 마음을 붙인 곳은 우습게도 ‘쑤저우 쭝신(苏州中心. 소주 중심)’이라 불리는 커다란 쇼핑몰이었다. 쑤저우는 그 규모만으로 보면 절대 작은 도시가 아니지만, 내가 사는 곳은 밤 9시만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가 끊겨 버리는 곳이고, 지하철을 타려면 20분을 걸어가야 하는 곳이며, 내가 원하는 모든 물건이 있을 만큼의 큰 마트를 찾아가려면 택시를 타고 20분을 달려야 하는 곳이다. 그런 생활에 어느 순간 마음이 답답해진 나는,
"사람 많고 번잡한 곳 좀 알려주세요."
라고 부탁을 했고,
"그럼 토요일에 일 마치고 쑤저우 쭝신에 가보세요."
라는 말을 듣고는, 이곳으로 향했다. 막상 가보니, 사무실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였는데 그걸 모르고 처음엔 택시를 타고 찾아갔던 곳.
이곳이 바로 쑤저우 센터이다. 사실 이 쇼핑몰과 '동방지문', 그리고 'Suzhou Zhongnan Center'는 한 군데 모여 있어서 그 명칭 구분이 정확하게 되지 않는다. 구글링을 좀 해보니 'Suzhou Zhongnan Center'는 중국에서도 그 높이가 가장 높다는 빌딩인 것 같고, '동방지문'은 바지 모양을 한 건물이며(실제로 '바지 건물'이라 부른다.), 내가 이야기하는 이 쇼핑몰의 영어 명칭은 그냥 'Suzhou Center'인 듯 하다. 하지만 택시 기사들에겐 '쑤저우 쭝신'이라고 해야 알아들으니까 난 그냥 '쑤저우 쭝신'이라고 부르고 있다.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붐비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서울의 여느 쇼핑몰에 비하면 말이다. 그런데도 이곳에 처음 왔을 땐, 그 익숙한 번잡함에 마음이 편해졌다. 눈에 익은 브랜드들과, 밤을 밝히는 네온사인과, 내가 들어가고 나와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그 무심함에,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해져서 나는 이 곳을 한참이나 혼자서 돌아다녔다.
저 높이 솟아 오른 건물이 '동방지문'이고, 그 아래 우주선 같은 지붕으로 덮여 있는 것이 '쑤저우 센터'이다.
그 후로, 외로울 때마다 종종 딱히 살 것이 없어도 쑤저우 센터를 찾아가곤 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지났고, 여름이 왔고, 추위가 물러갔고, 대신 이른 더위가 이 도시를 덮쳤지만, 그와 함께 미세먼지도 사라져서, 드디어 숨을 쉴 수 있게 된 나는 햇빛이 뜨거워지기 전, 또는 햇빛이 가라앉은 후, 조금씩 이 도시를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4월과 5월에는 보기 힘들었던 하늘이, 드디어 내가 알던 '하늘색'을 보이기 시작해서 사람들은 덥다고 투덜대도 나는 매일매일 '오늘 날이 좋네요.'라고 말하기 시작한 6월.
그런, 여름의 쑤저우에 해가 지고 있다.
집에서 25분쯤 걸으면 이 진지후에 도착할 수 있다. 택시를 타고 휙- 이곳까지 까면 땀 흘리지 않고도 이 풍경을 볼 수 있지만. 나는 늘 시원한 옷을 입고, 부채 하나를 가방에 넣고,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슬리퍼를 끌고 이곳까지 걸어오는 쪽을 택한다.
'진지후까지 걸어간다고요?'
라고 사람들은 왜 그런 일을 하느냐는 듯 묻지만, 저녁 바람이 불기 시작한 이 도시의 거리를 혼자서 걷는 여유를 사람들은 모른다.
정말 좋은데. 덕분에 나는 쑤저우가 조금 좋아지기 시작했는데.
상하이의 황푸강은, 훨씬 더 빛나고 훨씬 더 아름다웠다. 대신 그곳은 여행하는 이들의 공간이고, 관광을 위한 공간이다. 하지만 진지후는 조금 덜 빛나고 조금 덜 화려해도, 이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공간이고, 그러니까 우리들의 삶을 위한 공간이다.
저 멀리 보이는 동방지문.
음, 그러니까 이제는 더 이상 쑤저우에서 불행하지 않다.
쑤저우는 언제나 이렇게 평화로우니까.
사실 나에겐 사랑하는 이국의 도시가 있다. 난 이스타불이 좋아서, 그 도시를 여행하고 돌아온 지 석 달 반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그 도시로 돌아가 석 달 동안 터키를 헤맸었다. 그리고 그 도시를 다시 떠나올 때는 이스탄불과 헤어진다는 생각에 마음이 울적해져서 한참이나 그 도시의 거리거리를 혼자서 돌아다녔다.
난 더블린이 런던이나 파리만큼 아름답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유럽의 다른 곳을 돌아다니다 더블린으로 돌아가면 늘 마음이 편해지고는 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나도 모르고 더블린을 'My home'이라 불렀고, 그러니까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리고 다시 중국으로 떠나온 후에도 언제나 더블린이 그리웠었다.
그렇게 어떤 도시를 마음에 품는다는 건 특별한 일이다. 그냥 그 도시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쯤 마음이 행복에 젖어들곤 하니까.
쑤저우를 이스탄불처럼 사랑하지는 못할 거란 걸 안다. 하지만 어쩌면, 이곳에서도 세 번쯤 해를 보내면, 더블린을 '나의 도시'로 여겼던 것처럼, 쑤저우 역시 나에게 '나의 도시'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요즘은 생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