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코 키즈(トー横キッズ)'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일본에서 2020년대 들어 가장 주목할만한 사회 문제로 꼽힌다는 '토요코 키즈'는 가정환경이 불우하여 가출을 감행한 청소년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시내의 번화가에서 삼삼오오 짝을 이뤄 노숙을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청소년이 해서는 안될 각종 범죄에 손을 대기도 한다.
높은 확률로 시나모롤이나 마이 멜로디 굿즈를 가방에 주렁주렁 달고 다닌다는 특징이 있는 이 토요코 키즈를, 대한민국 어느 읍지역 소재의 초등학교 6학년 교실에서 목격하게 된 것은 어느 해 3월이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진서.
6학년이라고 절대 예상하지 못할 만큼 진서의 행색은 남달랐는데,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3월임에도 속옷이 보일 만큼 짧은 치마를 입고 화장은 가부키 스타일이었다. 책가방이나 실내화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3월의 첫날이라고 얼굴을 비추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친구 하나 없는 그 아이는 불량한 행색, 습관적인 지각, 시니컬한 말투, 상스러운 욕설로 단단히 무장된 우리 반의 이단아였다. 느지막이 등교는 했지만 수업 내내 잠을 잤고, 화장실을 간다고 나간 후에 1시간이 지나야 겨우 들어왔다. 학교 생활에, 또래 관계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 아이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반(反)의 길을 걸어왔는지 가늠이 안 될 정도였다. 교사로서의 사명감과 무력감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던 나는 이 아이가 무사히 졸업을 하게끔만, 적어도 학교에 붙어있을 수 있게끔만 노력하자는 다짐을 조심스레 했다.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들이 방황하는 대부분의 이유가 가정에서 충분한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내 나름의 통계가 있었기 때문에, 나라는 어른의 관심이라도 괜찮다면 최대한 주고 싶었던 것이 그 시절의 내 사명감이었다. 그렇게 나는 방과 후 교과보충 수업을 한다는 명목으로 진서를 붙잡았다. '선생님이랑 수학 문제도 풀고, 이것저것 이야기도 하고, 맛있는 간식도 시켜 먹자'라는 말이 의외로 통했던 것이다. 그런 걸 보면 아직 열세 살이긴 했다.
6월의 어느 날, 점점 더워지는 날씨 때문에 공부에 집중이 잘 안 되는 날이었다. 학교 주변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시켜 먹으면서 진서와 잠깐 나누었던 대화가 기억에 난다. 평소에 진서가 늦게 등교할 때 전화 통화를 했던 보호자가 항상 외할머니였던 것이 궁금했던 차였다. 마침 공부도 잘 안되겠다, 떡볶이는 맛있겠다, 분위기가 괜찮다 싶어 진서에게 가족 이야기를 살짝 꺼냈다.
"진서야. 할머니는 몇 시에 일하러 가셔?"
"할머니요? 새벽 6시?"
"아, 엄청 일찍 나가시는구나. 할머니가 어릴 때부터 키워주신 거야? 그러면 할머니랑 엄청 친하겠다"
"아뇨. 예전에는 친했는데 이제 할머니 잔소리 귀찮아요."
"그래도 진서 너를 위해 해주시는 말들일 거야. 그런데 진서야, 선생님이 진서 어머니랑도 통화해보고 싶은데 전화번호 좀 알려줄 수 있어?"
"엄마요? 엄마는 제 전화도 안 받아요."
진서는 무척이나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혹시 모르잖아. 알려주면 선생님이 통화 한 번 해봐도 되지?"
"네"
그러면서 진서는 학습지 귀퉁이를 뜯어 순순히 전화번호를 적어줬다. 선생님이라도 꼭 통화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그런 표정과 몸짓이었다. 그리고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맨날 남자친구랑 있느라 전화 안 받아요. 우리 엄마는 미혼모라서 저는 아빠 얼굴도 몰라요. 엄마가 저 18살 때 낳았는데 저 없애자고 했대요. 그런데 외할머니가 자기가 키운다고 해서 낳았대요."
미혼모. 엄마의 남자친구. 아이를 없앤다는 이야기.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럴 수 있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이 정녕 초등학교 6학년의 입에서 담담하게 나올 수 있는 종류인 것인가. 나는 어떻게 그 순간을 넘어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그때 진서에게 위로를 했을까, 다독여줬을까, 아님 어른답게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대답했을까. 무엇이든 간에 썩 자연스럽지 못한 반응을 했던 것 같아 괜스레 미안해진다.
계절이 바뀌어갔다. 나의 관심이 역부족이었는지 진서는 점점 더 학교생활에 흥미를 잃어갔다.
7월에는 고등학교 2학년 남자친구를 데리고 학교에 왔다. 고등학생이 초등학생을 만난다는 것부터가 의도가 불순해 보였다. 나는 진서의 남자친구에게 건전하게 교제할 것을 진심으로 부탁했다.
9월에는 등교를 하지 않기 시작했다. 할머니께 여쭤보니 진서가 등교를 한 것으로 알고 계셨다. 이 아이가 할머니의 손을 떠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미인정 결석이 이어지자 나는 어쩔 수 없이 가정방문을 했고, 집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진서를 봤다. 나는 그렇게 감정적인 사람이 아닌데, 화보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가슴이 답답했다. 이 기지배가 진짜 어디까지 가려고. 한껏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을 끝끝내 참았다. 진서와 외할머니의 보금자리인 단칸방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고, 고양이를 품에 끌어안은 진서와 내일은 꼭 등교하자고 약속했던 기억이 난다.
11월에는 어느 학생조직에 들어갔다며 자신의 서열이 몇 위라는 등의 말을 자랑스럽게 하는 진서에게 화를 냈다. 도대체 왜 멈추지 않는 것인지, 주변에 이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낼 사람이 정녕 없는 것인지 너무나도 답답했다. 이때까지도 진서 어머니는 내 전화를 단 한 번도 받지 않았다.
12월에는 외박을 시작했다. 그것도 몇몇 가출 청소년들과 모여 원룸을 구했단다. 기함할 노릇이었다. 진서는 같이 사는 고등학생 언니와 베이킹을 해서 돈을 벌 것이라고 나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담담하게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선생님, 꼭 초등학교 졸업해야 해요?"
다 왔으니 한 달만 더 버텨보자.
다녀보자가 아니라 '버텨보자'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삼일의 한 번 꼴로 학교에 얼굴을 비추던 진서는 끝끝내 버텨냈다.
졸업식에 진서의 가족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학교에 부탁해 미리 꽃다발을 준비한 것이 담임으로서 나의 마지막 사명감이었고, 진서의 몇 안 되는 주변 어른으로서의 마지막 애정이었다. 그렇게 꽃다발을 받고 집에 돌아가던 진서의 뒷모습이, 졸업식에서조차 짧은 치마를 보란 듯이 입고 온 진서의 붉은 다리가 아직도 어른거린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아이들에게 충분한 관심과 사랑을 주기를 감히 바라지도 않는다. 작디작은 최소한의 관심만 있었어도, 진서는 이렇게 울타리 밖으로 내던져지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진서처럼 살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내가 감히 확신할 수 있는 건 삶의 첫출발을 어렵게 시작한 아이들이 어린 날의 상처를 극복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과 최소한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고 불행한 길로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확실한 것, 일개 교사의 관심과 노력은 생각보다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본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조건, 가족이다.
가정환경이다.
그것이 전부다.
모든 아이들은 사랑받아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