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엔 스모키
환자 이야기는 되도록 안 하려고 하는 편입니다.
그들의 진료기록이 나의 이야기보따리가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진상 보따리에서 풀어내야만 직성에 풀리는 이야기들이 생긴다면? 그때는 부담 없이 썰을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미련이 남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진상 보따리에서 진상 모래주머니를 하나둘씩 꺼내 어딘가에 오지게 던져버리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던지지 않으면 저어 뒤통수 끄트머리에 남아 매일같이 끄집어내서 되새김질됩니다. 식도로 넘어가지 않고 두개골 뒤로 빠져 머릿속에서 맴돕니다.
뒤통수가 찌릿해질 때가 술 마시고 하소연할 타이밍입니다.
제 친구가 남의 말 안 듣는 상사 욕 하듯이, 저도 제 말 안 듣고 우기기만 하는 환자 욕을 합니다. 다른 친구는 그러더라고요. 야 그래도 넌 돈 잘 벌잖아.
너도 인마, 내 진상 보따리에 지금 발끝 담갔다. 곧 아킬레스건 들어간다 꽉 잡아라.
아무튼 저의 우울증은 진료를 하면서 심해졌으니 치과 초기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국가고시를 치고 나니 5시쯤 됐었을 겁니다. 버스를 타고 독서실로 돌아와서 짐 정리를 하고, 가채점하긴 싫었습니다. 인턴 중인 언니를 찾아 치맥을 하러 갔습니다. 그녀는 웬일로 누워있지 않았습니다.
"시험 잘 쳤어?"
"몰라, 치긴 쳤어. 나는 지금 슈레딩거의 고양이 같은 거야. 합격한 나와 떨어진 내가 같이 존재해."
"헛소리 말고 밥 먹어"
같은 이공계 여자끼리 알아주질 않네요. 슬슬 취기가 올라 눈앞에 슈레딩거 형 네 고양이가 두 마리 보일 무렵 먼저 졸업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취직자리 알아봤어?"
얘는 예나 지금이나 성격이 참 급합니다. 국시 막 친 사람한테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가채점도 안 했어."
"그럼 여기 좋은데 있는데 면접 보러 가주라."
붙었는지 모른다니까 그러네.
몰라, 그날인지 다음날인지 병원 대표원장님께 전화드렸습니다. 암튼 면접을 보기로 했습니다.
테크니컬 인터뷰는 많이 해봤는데 치과 인터뷰는 처음이라 떨렸습니다. 일단 의사면허가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르는 상태니까요.
"이력서 주시겠어요?"
"이력이 없어서 이력서를 안 가져왔어요."
"그건 그렇네."
이력이 없는 걸 어떡합니까. 구라칠 수도 없고...
"언제부터 나올 수 있어요?"
"음... 제가 2주간 홍콩에 갈 거라서 2월 말부터 나오면 안 될까요?"
"홍콩에 놀러 가나요?"
"네, 장거리 연애 중이라 오래간만에 남자 친구 보러 가요." 첫 만남에 투머치 인포메이션
"네. 그럼 2월 말부터 출근하러 오세요. 가운 사이즈는 어떡할까요?"
"남자 M 아니면 66 사이즈 해주세요."
"크지 않을까요?"
"안 큽니다."
의사면허가 나오고, 실장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원장님~ 의사 등록해야 하니까 공인인증서 가져오셔야 합니다."
"네, 노트북 채로 들고 가면 되나요?"
"아니요, USB에 넣어오셔야 해요~"
그날부터 실장님은 직원들과 모여 새 페이닥터가 바보면 어떡하냐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