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아이를 나이로비 보건소에서 출산했다. 수녀님들이 간호사인 가톨릭 보건소였다. 도대체 어떤 용기가 있어서 병원이 아닌 보건소를 찾아갔는지 모른다.
생활이 녹록지 않았던 2008년. 세계 경제는 어려웠고 1달러에 한화 1,800원까지 올랐다. 나이로비 대학병원과 인도인이 운영하는 아가칸 종합병원은 꽤 유명했지만 자연분만비가 200백만 원이 넘었다. 보험도 없었던 터라 두 아이들은 현지인들이 가는 보건소에서 예방접종을 했다. 타고난 성격이 워낙 낙천적인 사람이라 고민 없이 보건소를 애용하게 된 것이다.
아이를 낳고 몸조리하는 동안 산후 우울증이 찾아왔다. 한국에서 두 아이를 출산했을 때 경험하지 못한 슬픔이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키 큰 나무에 달린 주황색 꽃송이를 보며 참 많이 눈물을 흘렸다. 엄마가 그리웠고 따스한 마음을 나눌 사람들이 그리웠다.
가족 친척 전혀 없는 나이로비의 삶에 나름 잘 적응하고 있다며 스스로를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내 생각과 다르게 호르몬은 수시로 감정을 변덕스럽게 만들었다. 스스로 마음을 어찌할 수 없게 되자 케냐에서 사귄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음이 답답해 죽을 지경이야!"
나의 간절한 마음이 그녀에게 전해졌는지 친구는 하루 여행 계획을 일사천리로 준비했다.
친구는 나를 위해 여행사를 운영하는 사장님께 위로 여행을 지원해 달라 했고 한국 사장님은 그녀와 우리 가족을 위해 천장이 열리는 사파리 차와 운전사를 보내 주셨다.
케냐에 온 지 2년 만에 처음 가는 사파리 여행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을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 흥분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초승달 섬을 가기 위해 배를 탔고 호수 위를 자유롭게 날 아다니는 수많은 종류의 새들을 보고 큰 입을 벌려 장난치는 하마 가족을 보고, 사이좋은 기린 한쌍을 보고, 임팔라와 가젤을 보니 답답한 마음이 `뻥`뚫렸다.
하루아침에 산후우울증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친구와 나는 좋은 교제를 나누었고 우리 가족이 안식년을 한국에서 보내고 다시 케냐로 복귀할 무렵 그녀의 가족이 한국으로 안식년을 오게 되었다.
우린 신촌 어느 유명하다는 중국집에서 만나 자장면을 먹으며 그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그녀의 가족은 2년이라는 시간을 한국에서 보내고 케냐가 아닌 마닐라로 떠났다. 건조하고 뜨거운 날씨인 나이로비와 다르게 동남아시아 필리핀의 후덥지근한 날씨에도 그녀는 씩씩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나는 그 손을 외면하지 못한다. 때론 도움을 주다가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다시 손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지금은 마닐라의 여인이 된 그녀가 내 손을 잡아 주었기 때문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