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내내 눈이 많이 오던 양평에는 어느덧 봄이 찾아왔다. 아직은 코끝이 차가운 날씨에 남자는 정원에서 강건너의 산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강 선생님, 제가 누구인지 모르시겠어요?”
“글쎄… 요.”
여자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TV에서 본 것 같다고 말하자 남자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훨씬 전에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여자는 눈으로 어디서라고 묻자 남자는 피식 웃었다. 3개월 만에 처음 보는 웃음이다.
“강 선생님이 처음 이 집에 왔던 날, 거실에 있던 분들은 저의 이모들이세요. 제가 고등학교 여름 방학에 잠시 한국에 나온 적이 있어요. 그때 이모가 목회하는 교회를 다녔어요. 학생부를 지도했던 분이 강 선생님 남자 친구 분으로 기억해요.”
남자는 6살 때 부모님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했다. 4년 전에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한국에 나왔다가 우연찮게 큰 이모가 운영하는 연예인 기획사를 통해 드라마를 찍게 되었다고 한다. 이국적인 외모와 완벽한 한국어로 하루아침에 인기스타가 된 남자는 방송에서는 알렉스 킴으로 불리었지만 김지훈이라는 이름을 더 좋아한다고 한다.
남자는 하얀 종이에 연필로 스케치를 하며 10년 전의 여자의 모습은 밝고 웃음이 많았다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그때의 남자친구와 결혼을 했냐고 물었다. 여자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보며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 친구는 10년의 연애 끝에 남편이 되었는데……. 이제 성훈 씨는... 없어. 하늘나라에 갔거든, 벌써 3년이나 되었네.”
여름이 시작될 무렵, 남자는 산봉우리에 눈이 소복이 쌓인 그림을 완성시켰다. 그는 산이름이 아프리카에 있는 킬리만자로라고 말했다. 남자는 CF를 찍기 위해 케냐 엠보셀리 국립공원에 갔다가 아름다운 산을 카메라에 담아 왔다고 한다. 킬리만자로 산은 파란 하늘 아래 자신의 매력을 과시하듯 하얀 눈을 머리에 얹고 있었다. 산 위에서 성훈이 여자를 향해 웃고 있는 것 만 같았다.
요리수업을 하고 난 후, 남자는 양평에 있는 들꽃수목원을 산책하자고 했다. 하얀 얼굴에 선글라스를 낀 남자의 모습이 근사했다. 자세히 보니 진짜 연예인 알렉스 같다고 말하자 남자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엿보였다. 야생화와 허브가 심긴 식물원 길을 걸으며 그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강 선생님, 앞으로 우리 친구로 지내요.”
고른 치아를 드러내 놓고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가 아름다웠다. 여자는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둘은 끝없이 펼쳐진 연꽃을 보며 걸었다. 나무의자에 앉아 해가 뉘엿뉘엿 지는 모습을 보며 남자는 양평에 온 이유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는 첫 드라마를 찍고 여러 곳에서 러브콜을 받았다고 한다. 드라마 촬영과 CF, 인터뷰와 예능프로까지 3년 동안 정신없이 스케줄에 끌려 다녔다. 남자는 자신의 원하던 삶이 아니다는 것을 알고 기획사 사장에게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장인 이모는 계약 위약금을 물어 주면 회사가 망한다며 남자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그는 이모의 사업을 위해 버티다가 결국에는 공황장애와 우울증으로 모든 방송 활동을 중단하고 말았다.
여자는 남자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고 한참이나 토닥거렸다.
“아픈 것은 살아있다는 거야. 살아있는 모든 것은 아픈 거야. 이젠 우리도 조금만 아파하자.”
남자는 해지는 저녁노을을 보며 여자의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남자는 여자가 친환경 유기농 농업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부터 전국 유기농 농장을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둘은 양평에 있는 유기농 농장 여러 곳을 방문하며 친환경 비료를 만드는 법을 배웠다. 어느 농장에서는 밭에 숯을 깔고 대나무 톱밥과 쌀겨와 깻묵을 물에 섞어 3개월 동안 발효를 시켜 비료로 사용하고 있었다. 농장을 방문한 후에는 차 안에서 자연친화적인 먹거리와 지구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나누었다. 남자는 여자가 유기농 먹거리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면 두 눈이 유난히 빛난다고 했다. 둘은 강가의 집 앞의 강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여자는 어느새 소리를 내며 웃고 있었고 살아있다는 것이 기뻤고 남자는 음식을 잘 먹으며 점점 혈색이 좋아졌다.
서울 근교에 있는 농장을 방문하고 양평으로 돌아오던 날, 여름 장마가 시작되었다. 남자는 차 창밖으로 쏟아져 내리는 빗방울을 검지로 누르며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빗방울이 별처럼, 강유리 씨처럼 아름답네요.”
양평의 들판이 갈색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남자의 큰 이모가 강가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영화를 다시 찍기로 했다며 식단과 운동에 신경을 썼지만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어두워 보였다. 촬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남자와 일행은 캐나다로 떠났다. 2주간 해외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그는 여자와의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아래층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여자는 처음으로 남자가 머무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의 방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다시 시작한 촬영이 힘에 부쳤던지 남자는 침대 위에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피곤에 지쳐 잠든 얼굴을 처음으로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굵은 눈썹과 숱 많은 속눈썹, 오뚝한 콧날, 코에서 입으로 이어지는 깊은 인중, 선이 분명한 입술을 보며 보기 드물게 잘생긴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른 볼과 턱에 거칠게 자란 수염을 보는 순간 손이 ‘파르르’ 떨렸다. 여리게 만 생각했던 그의 모습이 갑자기 남자로 다가왔다. 여자의 아랫배에서 뜨겁고 묵직한 기운이 ‘훅’ 올라왔다. 성훈이 죽은 후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이블 위에 놓인 남자의 커다란 손등에 솟아난 힘줄을 보니 심장이 마구 뛰었다. 도저히 떨리는 손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목구멍 안으로 침 넘어가는 소리가 지훈에게 들릴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숨을 죽이며 방을 나오려는 순간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았다. 남자는 그의 왼쪽 손가락을 여자의 오른쪽 손가락에 깊숙이 끼워 넣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이나 그렇게 있었다. 남자가 다시 깊은 잠으로 빠져들자 여자는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여자는 남자가 꿈속에서 그녀의 손을 잡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어느 때는 밤샘 촬영으로 강가의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짧아졌다. 남자가 강가의 집에 온다는 연락을 그의 메니져에게 받았다. 여자는 유기농 마트에서 시장을 본 후 강가의 집에 도착을 했다. 남자의 매니저가 위층에서 내려오면서 알렉스가 빡빡한 일정으로 몸에 무리가 왔다고 했다.
햇살이 가득한 방에 핼쑥한 남자의 얼굴이 안돼 보였다. 이마에 손을 얹어보니 열이 오르고 있었다. 여자는 위층과 아래층을 오가며 차가운 물수건으로 남자의 이마와 마른 입술, 목과 손을 닦아 주었다.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는 그의 모습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던 성훈이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성훈의 죽음 앞에서는 기도가 나왔는데 남자의 앞에서는 노래가 나왔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동요가 너무 아름답고 슬펐다. 여자는 아기가 되었다가 엄마가 되었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울지 말아요. 유리 씨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
지훈의 커다란 손이 여자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창밖으로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날 저녁에 여자는 서울로 올라와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목사님 부부에게 한국을 떠나기로 결정했다고 말하자 사모님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그녀를 안아 주셨다. 목사님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알던 친구라며 케냐 목사님 e-메일 주소를 적어 주셨다. 목사님 내외분은 여자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축복해 주었다. 사모님에게는 지훈에게 그녀가 가는 곳을 알리지 말라고 부탁을 드렸다. 한국을 떠나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사모님으로부터 한 통의 메일이 왔다. 지훈은 그해 영화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았고 연예계에서 은퇴를 했다는 소식을 보내왔고 그 이후로는 그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