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

세 번째 이야기

by Baraka

가 사는 마을은 바다처럼 커다란 호수를 가운데 두고 만들어진 곳이다. 호수에는 하마와 큰 민물고기가 있고 숲에는 각종 새들이 모여 산다. 큰 부리의 페리카나가 떼 지어 호수 위를 날아다니기라도 하면 마치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 춤을 추는 것만 같다. 호수 건너편에는 개인 소유의 초식동물 공원이 있고 주위에는 세련미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투박한 캠프촌이 줄지어 있다. 동네 사람들 중에는 오래전에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았는데 영국인 윌리엄 가족은 3대째 골프장과 호텔을 운영하고 있다.

라키피의 아침은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마치 인류가 시작된 에덴동산처럼 환희가 넘쳤다. 애플 망고와

엘로 망고는 이브와 아담이 하나님 몰래 따 먹었던 금단의 열매처럼 달콤하게 익고 있었다.

유는 가벼운 잠바를 입고 농장으로 이어지는 오솔길로 걸어갔다. 길가에는 에인절 트럼펫이 고개를 들어 올리고 있다. 꽃 이름이 유난히 긴 예스터데이, 투데이, 투모로가 이른 아침부터 향긋한 향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발밑으로 밟히는 자갈 소리가 내 귓가에 경쾌하게 들렸다. 길버트는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꽃나무를 정리했다.

유, 잠보.”

“잠보, 길버트”

농장 책임자인 사이먼은 어젯밤 멧돼지가 감자와 고구마 밭을 망쳐놓았다며 울타리 사이사이에 가시나무를 촘촘히 심고 있었다.

여행사 사장인 체리티에게 문자가 왔다

"유, 오늘 라피키에 4명의 손님들을 모시고 가려고 해. 우리 부부도 함께 가기로 했어."

체리티는 여행객들 사이에 소문이 난 라피키의 양고기 숯불구이 주문을 했다. 양고기 특유의 냄새를 잡아주는 각종 허브를 뿌려서 재빨리 재워놓았다. 오솔길 왼쪽 숲에서는 편백나무향기가 풍겨 났고 비파나무 사이에 거미가 집을 짓고 있었다. 숲은 유의 영혼에 새로운 영감을 부어 준다. 바구니 안에 잘 익은 토마토와 노란색과 빨간색 파프리카를 따 넣었다. 오이와 상추, 비트와 고추 그리고 고수를 담아 자갈길을 걸어 나왔다. 요리를 할 때 유난히 손발이 잘 맞는 메리와 함께 카춘바리와 상추 샐러드를 준비했다. 길버트는 야외 식당에 모닥불과 숯불을 준비했다. 케냐에서 숯불고기를 먹을 때 빠질 수 없는 음식이 있다. 잘 익은 토마토와 보라색 양파가 들어간 카춘바리라고 불리는 샐러드다. 매운 보라색 양파를 잘게 썰고 빨갛게 익은 토마토를 같은 모양으로 자르고 매운 고추를 썰어 넣고는 마지막으로 고수와 소금으로 담백하게 간을 하면 케냐식 샐러드가 된다. 라피키에서 지내는 동안 유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고 예전의 밝은 모습을 되찾았다.

체리티 부부와 함께 온 사람은 영국에서 온 젊은 커플과 50대 이탈리아인 부부였다. 양고기가 숯불 위에서 익어가고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는 손님들 한 명, 두 명 모여들기 시작했다. 젊은 커플은 신혼여행 중이라며 처음 마셔본다는 생강 음료인 스토니를 좋아했다. 나이로비에 살고 있는 이탈리아인 부부는 NGO 단체에서 일한다며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쏟아 놓았다.

“이슬람 마을에서 남편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버림받은 여성들을 돌보고 있어요. 최근에는 그 지역 5명의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함께 살고 있어요.”

부부에게는 자신들이 낳은 아이들은 없다고 했다. 그들은 5명의 아이들을 잘 양육해서 이탈리아로 대학을 보낼 계획이라며 장학금을 알아보고 있다고 한다. 세상에는 자신의 이익보다는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음식 세팅을 하고 부엌으로 들어오는 유를 체리티가 뒤쫓아 왔다.

“유, 어제 여행사 사무실로 어떤 남자가 왔었어. 한국에서 온 강유리를 아냐고 물었어. 너의 한국 이름이 강유리야? 나는 네가 한국사람 인 줄도 몰랐어.”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유, 너는 나라와 민족 상관없이 소중한 내 친구야. 알지? 그 남자가 최근에 우리 여행사 블로그에 프랑스 아가씨들이 올린 사진을 인터넷에서 본 것 같아.”

유는 그가 혹시 지훈이 아닐까?라는 괜한 생각이 들었지만 곧바로 떨쳐 버렸다.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 차 한 대가 라피키에 들어오고 있었다. 4륜 구동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 메리가 손님을 방으로 안내를 했고 손님 뒤로 길버트가 짐을 나르고 있었다.


농장을 한 바퀴 돌고 나온 유에게 메리가 말을 건넸다.

“어제 온 손님이 라피키에 한 달 예약을 했어요. 손님이 유럽에서 온 줄 알았는데 동양인이더라고요.”

라피키에 동양인이 방문한 것은 처음이다. 진흙이 잔뜩 묻은 장화를 양손에 하나씩 잡고 힘껏 박수를 치듯 때렸다. 장화 밑에 끼어 있던 진흙이 땅으로 '후두득' 떨어져 나갔다.

유는 힐스 게이트 국립공원을 다녀 올 참이다. 공원은 라피키에서 차로 20분쯤 걸린다. 가끔 생각이 많아질 때 면 머리를 식힐 겸 다녀오곤 한다.

국립공원에 들어서니 길은 울퉁불퉁했지만 입구에서 차로 5분만 들어가면 확 트인 초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른 아침부터 진흙길을 달린 차바퀴 자국들이 정오가 가까이 오자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었다. 바위 아래에는 얼룩말 무리가 꼬리를 흔들며 풀을 뜯고 있었고 세 마리의 기린 가족은 가시나무의 잎사귀를 맛있게도 뜯어먹고 있었다. 가시 속에 작게 자라는 잎사귀를 어찌나 잘도 골라 먹는지 신기하다. 차를 천천히 앞쪽으로 움직이니 나무 그늘 아래에 20마리나 되는 물소 떼가 느긋하게 쉬고 있었다. 자연과 한 몸이 되어 살아가는 동물들을 카메라에 담아 본다. 차 시동을 끄고 잠시 눈을 감았다. 풀잎이 바람에 살랑살랑 스치는 소리에 몸이 나른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멀리에서 차 엔지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사파리를 끝내고 나오는 차 한 대가 천천히 지나갔다. 운전대를 잡은 모습이 눈에 익었다.

‘지훈은 잘 있겠지…….


한 차례 있던 농장체험 학습과 요리 수업을 끝냈다. 정원에 어두움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다. 바쁜 하루를 보낸 날은 마음을 정리할게 많다. 사무실 뒷문을 열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좁은 길을 지나 뒤쪽 정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길버트가 정성스럽게 가꾼 꽃나무들을 둘러보는데 키 큰 아보카도 나무 아래에 서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살짝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숨이 ‘확’ 막혔다. 지훈이었다. 마르고 약해 보였던 그는 건장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지훈이 유에게 성큼성큼 걸어오자 유는 다리가 얼어붙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강 유리 씨, 드디어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군요.”

유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신을 찾는데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어요. 저는 당신이 한국에 없다는 것을 영화 촬영을 마치고 나서야 알게 되었어요. 이모에게 당신 연락처를 물어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어요.”

유는 지훈에게 잠시 걷자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도 유리 씨를 잊을 수 없었어요. 당신이 내가 그린 킬리만자로 산을 좋아하던 모습, 유기농 재료로 함께 요리를 하던 모습, 강가를 걸으며 나누었던 대화, 전국 유기농 농장을 함께 다녔던 일,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가슴에 살아 있어요.”

지훈이 아픈 중에 고백했던 말은 진심이던 것이다.

“저는 미국으로 돌아가 대학원에서 세계 기후변화와 환경에 대한 공부를 했어요. 지금은 국제 환경단체에서 일하고 있어요."

지훈은 걸음을 멈추고 유를 내려다보았다.

“저의 마음을 알아챈 이모부가 케냐 목사님 e-메일 주소를 알려 주셨어요. 그리고 어젯밤 산책을 하다가 당신이 이곳에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어요. 작업실에 걸려있는 그림을 봤거든요.”

지훈이 유에게 선물로 준 그림이었다.

“케냐를 여행하는 동안 수많은 킬리만자로의 그림을 봤지만 내가 그린 그림은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이잖아요.”

유는 한국을 떠나오며 성훈과 지훈을 다 잊기로 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죽은 성훈보다 살아있는 지훈을 향한 그리움이 커져만 갔다.

“그때 왜 아무 말 없이 사라진 거예요?”

“두 사람에게 미안했어. 죽은 성훈에 대한 그리움과 지훈에게 향하는 마음이 두려웠어 …….”

지훈은 사랑했던 사람을 잊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새로운 사랑이 찾아와도 사랑했던 사람을 지울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라며 유를 살며시 안았다. 지훈의 가슴은 넓고 따스했다.


라피키에 아침이 밝아 왔다. 유와 지훈은 농장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 순간순간 눈이 마주치면 입맞춤을 하고 라피키를 걸으며 안개 낀 숲의 숨소리를 들었다. 촉촉한 대지는 꿈틀꿈틀 춤을 추며 아침을 깨웠다.

오후 4시, 바람이 비를 몰고 왔다. 하루 종일 맑았던 하늘에서 방울, 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비가 축복인 라피키에서 지훈과 유는 환한 미소로 하늘을 올려 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