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언덕 1층에서 숨죽여 울던 박 사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일한다는 한림읍으로 차를 몰았다. 중산간 도로에 오르자 오른쪽으로 한림 농장 간판이 보였다. 검은색 돌을 쌓아 올린 비탈길 옆으로 유채꽃이 꽃잎을 틔우고 있었다. 좁은 커브 길을 돌자 새로 지은 펜션 뒤로 청보리가 저 멀리에 보이는 바다와 함께 넘실거렸다.
자갈이 깔린 주차장에서 박 사장이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가 서 있는 주위로 벌써 여러 개의 담배꽁초가 버려져 있었다. 박 사장에게 제인 이름을 꺼내자 그의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래졌다. 그는 바다를 향해 오른손 검지로 점처럼 작은 곳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는 섬이 비양도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섬 안에 무엇이 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가봐야지 압니다. 가서 자세히 봐야 비양도를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박 사장은 모니카의 두 번째 남편은 자신의 사촌 형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말해 모니카는 그의 사촌 형수이지만 한 번도 형수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모니카는 형이 돈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결코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녀는 전 남편 재산과 그의 일가친척 땅과 집으로 대출을 받아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월세가 비싼 강남에서 럭셔리한 카페를 운영한 거죠. 사업은 잘되었죠."
모니카는 돈을 많이 벌면 벌수록 씀씀이가 커져만 갔고 비싼 외제차와 명품으로 그녀를 치장하느라 돈이 부족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카페에 8년 동안 돈을 쏟아부었지만 결국 부도가 났다고 했다.
그는 잠바 안에서 다시 담배를 꺼내 들었다.
“전 남편분은 어린 딸을 그와 상의 한마디 없이 미국으로 보낸 것이 충격이 컷을 겁니다. 그러나 더 큰 배신감은 모니카가 그와 이혼을 하자마자 재력가인 새로운 남자와 재혼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는 삶이, 돈이, 사랑이 싫었을 겁니다."
박 사장이 뿜어내는 담배 연기가 봄바람에 섞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모니카는 형의 고향인 제주도로 와서 형의 재산으로 모래언덕 카페를 시작했습니다. 기수 형의 돈을 조금씩 빨아먹었던 거죠. 모니카는 흡혈귀입니다.”
박 사장은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작은 섬 비양도를 쳐다보았다.
“형은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는 이스라엘로 여행을 갔어요. 그곳에서 구원자를 만나고 돌아온 형은 놓아 버렸던 붓을 다시 잡았습니다. 형은 죽기 전 6개월 동안 미친 듯이 그림만 그렸습니다. 그 속에서 그는 이미 천국을 경험한 사람처럼 평온해 보였습니다."
박 사장은 까멜리아 데이에는 모니카가 형의 유작을 비싼 가격으로 판다는 소식을 듣고 초대받지 않은 파티에 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거액을 지불하고 형의 초상화를 샀다고 했다.
좁은 계단 밑 지하실에서 살던 아이들은 매일 저녁 자신들의 하루 일거수일투족을 영적 아버지라는 자에게 보고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고 작은 몸으로 발길질을 받아 내야만 했다.
‘거짓말쟁이예요.’
‘도망치세요.'
‘무서운 사람이에요.’
'흡혈귀입니다.'
그림 속 캐더린의 슬픈 눈과 제인의 간절한 눈빛과 지하실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8명의 소녀들의 비명 소리가 귓가에 ‘윙윙’ 거렸다.
나는 며칠째 ‘보호 종료 아동 센터’ 주변을 맴돌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센터는 검은 모래 바닷가 부근에 있었다. 오늘도 한참이나 ‘해오름’이라는 간판을 쳐다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용기 없는 나 자신을 질책하는 순간 뒤에서 남자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희 씨 맞죠?”
스티븐 목사가 나를 알아본 것이다. 그가 운영하는 센터 1층에는 청년들의 숙소와 공부방이 있었고 2층에는 부엌과 쉼터가 있었다. 그 건너편으로 스티븐 목사의 서재와 사무실과 그의 작은 방이 있었다.
스티븐 목사는 10살 무렵 목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었는데 학교에서는 동양인이라곤 자신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방인으로 살아가면서 마음에 화와 분노가 쌓였을 뿐 아나라 그는 오랜 방황을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후 목사가 되었다고 했다. 그는 한국의 많은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테이블 위에 식어가는 청귤 차를 바라보며 나는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목사님, 도와주세요.”
교회를 떠나진 15년 만에 목사님이라는 단어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동안 마음 깊은 곳에 억누르고 있었던 미움과 분노와 증오 그리고 죄책감이라는 덩어리가 마구 쏟아져 나왔다.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나는 어렵게 제인의 이야기를 꺼냈고 한참이나 말을 쏟아냈다. 돌덩이처럼 무겁던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하늘에서 찬란한 빛줄기가 해오름 창문을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스티븐 목사 주축으로 해오름 청년들 8명과 주연이 부부, 한림 박 사장과 나 그리고 제인이 모래언덕에 모였다. 우리는 봉사활동 팀명을 ‘비전 팀’이라고 정했다. 비전 팀은 7월 중순에 케냐로 봉사활동을 가기 위해 12주 동안 토요일마다 모래언덕에서 모임을 가졌다. 14명의 사람들을 3조로 나누고 스포츠와 미술활동과 음악수업을 준비했다. 8명의 청년들은 태권도와 K-POP 연습까지 했다. 태권도에는 음악을 넣고 약간의 쇼를 추가했다. 아이돌 노래로 춤 연습하는 청년들 속에 제인의 모습이 자유로워 보였다. 가끔씩 불안한 눈으로 카페 안에 설치된 CCTV를 쳐다보기는 했지만 자신을 추슬렀다.
7월 중순 새벽 1시 30분. 조모 케냐타 공항의 새벽바람은 건조하고 차가웠다. 제인의 여권에 케냐 여행 비자가 찍히자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비전 팀은 4륜 구동 차량 3대로 나누어 타고 미고리로 달려갔다. 가로등 불빛이 없는 도로에는 어둠이 내려앉아 한 치 앞을 볼 수 없었지만 드라이버는 잘도 운전을 해 나갔다. 팀원들은 몸이 피곤했던지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창문에 머리를 부딪쳐가며 곯아떨어졌다.
우린 길가에 있는 어느 로칼 식당에서 씹기도 힘들 만큼 질긴 소고기로 만든 음식에 하얀 옥수수 가루로 만든 케냐의 주식을 먹었다. 제인은 미고리를 가는 동안 운전사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초원에서 풀을 뜯는 염소 떼를 보며 환성을 지르기도 했다.
한림 박 사장의 영어 실력은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제법 통역을 잘했다. 물론 제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동안 모니카의 감시를 받아 기가 죽어있던 제인은 자신의 밝은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그녀는 영어 실력으로 주눅 들어 있는 청년들에게 다가가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케냐 어린아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상혁 씨 이모님은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에너지가 넘쳤다. 스왈리어가 현지인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한국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30년 전에 미고리 지역으로 들어와서 학교를 짓고 교사들을 교육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현지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마치 천사처럼 여전사처럼 보였다.
우리는 미고리 지역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순회하며 준비해 온 수업과 공연을 마음껏 발휘했다. 한국 청년들이 K-POP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자 아이들은 약간 어색한 듯 쳐다만 보다가 금세 아프리카 식으로 춤을 따라 했다. 한국인과 케냐인 그리고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춤을 추며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비전 팀은 4주간의 봉사활동을 마쳤다.
스티븐 목사와 제인은 두바이를 경유해 미국으로 떠났고 주연과 상혁은 한 달 더 이모 곁에 있기로 했다. 나와 박 사장과 8명의 청년들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8월의 제주는 무척이나 습하고 더웠다.
여름이 끝나면 곧 가을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겨울이 올 것이고 한라산에 하얀 첫눈이 내리면 한라의 꽃, 까멜리아는 다시 피어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