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베라의 하루 (2)

오빠의 다리

by Baraka

식사 도우미를 마치고 우리가 할 일은 빨래를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Kim과 나는 빨래터로 자리를 옮기자 한쪽 구석에 마른 옷가지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건장한 남자 셋이서 장화를 신고 찬물에 뜨거운 물을 섞어 가며 빨래를 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하루 종일 빨래만 했다. 가톨릭 단체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센터였지만 구호품이나 재정이 넉넉하지 않아 보였다. 나이로비 마트에서 파는 기저귀는 거의 수입품이고 가격은 꽤 비싸다. 특히 성인들의 기저귀는 보기가 드물 정도이니 침대보와 이불과 옷이 수시로 빨래터로 나왔다. 나는 Kim에게 이곳의 장애인들은 어떻게 센터로 오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수녀님들이 수시로 키베라 안쪽으로 들어가서 쓰레기 더미와 길가에 버려진 아이들을 구출해 온다고 말했다. 센터 담 너머로 집들이 빼곡한 키베라 가 건너다 보였다. 그곳에서 누군가는 아이를 낳아 버리고 누군가는 버려지는 생명을 살려 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날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이었다. 나는 해가 질 무렵 더위에 못 이겨 시멘트가 발라진 안마당 문턱에 앉아 있었고 오빠는 아령을 집어 들고 운동을 하고 있었다. 오빠는 1년 내내 바지만 입었다. 집에서조차 발목까지 내려오는 운동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날은 더위 때문인지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올렸다. 나는 처음으로 오빠의 하얀 다리를 보았다. 그것도 가늘고 뒤꿈치가 살짝 들린 오른쪽 다리를 처음 본 것이다. 갑자기 가슴이 울컥하며 내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제야 오빠의 다리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의 삶이 읽혔다.

아침마다 학교를 갈 때면 동생들보다 빨리 집을 나섰던 오빠, 소나기가 내리기라도 하면 친구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후다닥' 뛰어가는 동안 오빠는 자신의 몸으로 빗물을 받아 냈을 것이다. 혹시라도 장대비가 쏟아지면 왼발에 힘을 꽉 주고는 힘이 없는 오른발을 끌고 뛰었을 오빠의 다리.

오빠는 총명했지만 가정형편으로 상고를 다녔다. 그는 주산을 열심히 튕기며 셈을 잘해 은행에 취업하고 싶었지만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졌다. 엄마는 오빠의 다리를 고칠 수 있다는 용하다는 곳을 알아보다가 대전의 어느 병원을 찾아갔다. 큰 수술이라서 돈이 많이 들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에 엄마와 오빠는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동네 가운데로 이사 오기 전에는 마을 초입에서 가장 먼 산 아래에 살았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을 꼭대기 집이라고 불렀다. 그곳에서 나는 태어났고 12살까지 살았다. 아랫동네로 이사 오기 전까지 엄마는 음력 초하루가 되면 시루떡을 만들어 바위와 우물과 산을 향해 손바닥에 불이 날정도로 빌고 또 빌었다. 그녀는 큰 아들의 한쪽 다리가 조금만 더 길어져 온전히 걸을 수 있길, 술을 먹기라도 하면 고주망태가 되는 남편이 알코올을 멀리하길, 3남 1녀의 자식들의 미래와 가정에 부를 달라며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아랫마을로 이사를 와서도 엄마는 비가 세차게 내리거나 눈발이 몰아치면 큰 아들 걱정뿐이었다. 엄마가 왜 그리도 큰아들, 큰아들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여름, 내 다리보다 하얗고 가느다란 오빠의 오른쪽 다리를 본 순간 모든 수수께끼는 풀렸다.


엄마는 교회를 다니고부터 한 달에 한번 만들던 떡을 더 이상 만들지 않았다. 대신 성경책을 들고 매일 새벽기도에 나가셨다. 엄마의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었을까. 오빠는 불편한 다리로 당당하게 사회의 일원이 되었고 가정을 이루었다. 내년에는 40년 동안 몸담았던 공직에서 정년 퇴임을 한다. 나는 오빠에게 고맙다고 수고했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해 줄 것이다.


케냐에서 보기 드물게 비가 오락가락하던 날 Kim에게 전화를 걸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우리는 장애인 센터를 방문하지 못했다. 그녀는 나의 전화를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에는 카베라 보다 형편이 어려운 장애인 센터를 가자고 한다.

가랑비가 멈추자 구름 사이로 해가 낫다. 케냐는 오늘도 걱정이 없는 '하쿠나 마타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