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창 너머로 여름을 마감하는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누군가 사무실 문을 크게 두드렸다. 예약 명단을 보니 오후 4시, 손님은 없었다. 네, 라는 짧은 상혁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활짝 문이 열렸다. 사무실로 들어선 사람은 보미였다. 그녀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두 눈에서는 살기마저 느껴졌다.
“선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난 거죠?”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보미는 연신 손바닥을 비볐다. 한참 시간이 흐르자 그녀가 상혁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불안과 두려움, 실망, 배신 그리고 절망스러움이 스쳤다. 그날은 한 여름 더위가 한풀 꺾이는 8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어느 오후, 상혁의 스마트 폰이 울렸다.
“잘 지내? 소식 들었지?”
K는 한숨을 크게 몰아쉬고는 말을 이어 갔다.
“보미가 요즘 불안해 보여. 그 사건 이후로 애가 확 달라졌어. 보미가 이해는 되는데 지금 상황에서 어쩌겠어, 너 진짜 몰랐던 거야?”
“무슨 말씀을...?”
“보미가 갑자기 사라졌단 말이야. 잠수를 탔어.”
보미의 잠적이 마치 상혁의 책임인 것처럼 K는 추궁하듯 몰아세웠다. 보미가 상혁의 사무실을 찾아왔던 이후로 그녀는 모든 SNS 활동을 중단했다. 상혁과는 어떤 상의 한마디도 없었다. 보미는 상혁과 S단체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다.
보미와 소식이 끊긴 지 1년이라는 시간이 다가온다. 진하게 내린 아메리카노가 목 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한 여름에도 차가운 팥 빙수보다 따뜻한 커피를 좋아하던 보미가 갑자기 그리웠다.
보미는 S단체에서 스태프로 일했다. 상혁은 그녀의 학교 선배이자 동료였다. 대학생 기독교 단체들 사이에는 S단체의 스탭은 학생들을 잘 케어하고 헌신적인 사람들이라고 소문이 나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체에서는 그 어떤 재정적인 지원이 없다. 사역비와 개인 생활비와 활동비등 모든 재정은 개개인이 후원을 받아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상혁이 S단체의 스탭이 되겠다고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을 때 제일 먼저 물어보신 것은 월급을 얼마나 받느냐였다. 재정은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드렸을 때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상혁을 쳐다보셨다. 교회를 다니시는 엄마조차도 사역자로 살려면 차라리 신학대학원을 가서 목사가 되라고 하셨지만 상혁의 다짐은 변함이 없었다.
서울에서 살던 상혁은 춘천의 K대학을 가게 된다. 신입생이었던 그는 S동아리 활동을 시작한다. 친구나 가족이 없이 대학에서 유일하게 상혁을 따스하게 챙겨준 사람들은 S동아리 선배들이었다. 물론 그는 매주 일요일마다 엄마와 함께 교회를 다녔었지만 대형교회에서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끈끈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비그리스도인들 조차도 S동아리 멤버들이 사랑으로 연합하는 모습을 부러워할 정도였다. 선배들은 인품이 좋았고 그들 중에는 학교를 졸업한 후 S단체 스태프로 일하고 있었다. 월급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개인이 후원을 받아서 일하는 곳임에도 헌신자들은 계속 나왔다. 상혁은 졸업을 앞두고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S단체 스태프로 살아가길 결심했다. S단체에서 스탭 훈련은 10개월이었다. 마치 신학교 4년을 10개월 안에 축소한 듯 성경적 지식과 기독공동체와 제자양육이며 세계관이며 빡빡한 수업이었다. 그리고 서울지부에서 인턴생활을 하고 스태프로 일하게 된다. 인턴생활 동안 적응하느라 힘들었지만 하루하루 의미 있는 생활이었다.
상혁과 보미가 가까워지게 된 계기는 전국 대학생들이 모이는 콘퍼런스의 강사 섭외를 맡으면서였다. 상혁보다 6살이 어린 그녀는 대학생들의 관심분야가 어떤 것인지 재치 있게 파악했다. 그녀는 25살이었고 상혁은 31살이었다.
상혁은 보미의 명랑하고 유쾌한 성격을 좋아했고 그녀는 상혁의 조용하고 냉철한 판단력을 좋아했다. 그러나 상혁은 S단체에서 4년을 일하고 대학원에서 상담심리학을 마치고 전문 상담가로 일하고 있다. 전문 상담사로 일한 지 3년이나 되었다.
상혁이 S단체에서 사임을 한 후에도 보미는 종종 사무실로 찾아와서 일에 대해 고민을 나누기도 하고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가끔은 상혁의 사무실과 가까운 건대 역에서 영화를 보고 먹거리 골목에서 저녁을 먹고는 한강을 산책했다. 보미는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과 열정으로 임했고 타인에 대해 동정심과 배려심이 많았다.
상혁은 보미가 사무실을 찾아오기 전에 보내왔던 카톡 내용을 기억한다.
「상혁 선배! 또 죽었어요. 이번이 세 번째라면서요. 제 친구 하영이가 죽었단 말이에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하영이가 아직 살아 있는데 생명줄을 끊는데요. 희망이 없데요. 하영이 뇌가 죽었다고 인공호흡기 줄을 떼어 낸데요. 지금 이 순간에도 하영이는 숨을 쉬고 있는데...」
보미의 깊은 슬픔이 상혁에게도 가슴 저리도록 전해져 왔다.
‘그래, 세 번째. 세 번째라니...’
상혁의 손이 덜덜 떨리고 가슴은 벌렁벌렁 뛰었다. S단체는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스탭을 태웠던 차량은 밤새 고속도로를 달렸다. 봉고차를 운전하던 스탭은 결국 졸음을 이기지 못하다가 차도를 이탈했다. 5년 전, 친구 환희는 스믈 여덟의 나이에 차가운 논바닥에서 목이 꺾이며 숨을 거두었다. 환희는 상혁에게 아직도 죽은 존재가 아니다. 스믈 여덟의 환희의 모습이 그의 곁에 머물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