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MONOLOGU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아름 Jun 24. 2023

자발적 들러리

두려워서 그런 걸요

브랜딩과 마케팅으로 국내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지인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그는 주로 분노할 때면 나를 찾는다. 고지식하고 직설적인 어법이라 때론 처음 겪는 이들은 공격적으로 받아들여 주눅이 들거나 다시는 대화를 하지 않는다. 그가 나의 지속적인 고객(?)이 된 까닭은 끝까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하루고 잘 들어주기 때문이다. 물론, 들어주는 것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인문학을 하는 아내와 단 둘이 사는 그는 아내와 진정한 친구 같다. 평생 차 한잔으로 저녁을 대신했던 부부는 저녁시간이면 책을 읽고 영상을 만들고 글을 쓰며 자신들의 담론을 밥 삼아 먹는다. 보기 드문 부부의 일상이다. 그렇게 이 삽 십 년 살아왔으면 참 잘 살아온 그들이다.      


그의 아들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아버지라고 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뒤통수를 보고 자라는데 아들한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고 싶다며 눈물도 많이 흘렸던 선한 그다.  

    


그가 사는 지역의 국비 사업이 이상하다며 나의 의견을 물어온다. 밑도 끝도 없이 그야말로 뜬금없이 국비사업 이야기다. 예산을 이렇게 낭비해도 되는지, 단체장을 만나자고 면담을 신청해도 모두 다 외면한다고 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의 날카로운 질문에 답변을 할 수 없으니 아예 안 만나주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어떻게 국가의 예산을 이렇게 밥에 물 말아먹듯 하냐고 한다. 개인적으로 그가 직접적인 피해를 받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시민으로서 분노하고 있었다. 담당 공무원도 사업의 문제점은 알지만 공약사업이니 어쩔 수 없애 해야 한다고 한단다. 알면서도 하는 그들은 정말 부패했다고 그가 가슴 아파한다. 그를 순수하다고 표현해야 할까? 아니면 아직도 피가 뜨겁다고 해야 할까?

      

한 번은 지역 학교 운영위원으로 예산심의위원회에 갔더란다. 30여 명 되는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는데 일반수용비가 700만 원이 배정되었길래 일반수용비의 용도가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했다. 아이들의 식비 이외에 특별식을 주고 싶어 30명분의 밥값을 따로 잡아놨다고 교장 선생님이 그러더란다. 그냥 넘어갈 그가 아니다. 그럼 아예 정식으로 식비로 하지 30명 특식비를 700으로 하냐고 했단다. 밥값으로 별도 예산을 잡아놓고 일반수용비로는 특식을 잡아놨다고 하니 그로선 어이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학생 30명이 두 끼 먹을 특식비 치고는 많은 것은 사실이다. 눈치 없는 그가 일반수용비를 집요하게 물어보니 분위기가 싸했을 것은 자명하다.      


문제는 그가 예산서를 보고 질문을 하자 위원회 분위기가 얼음장같이 변하면서 위원들이 공격을 하더라는 것이다.

아무려면 학교에서 예산을 허투루 쓰겠어요? ‘ 왜 그렇게 꼬치꼬치 알려고 해요?”     





그는 운영위원회에 자신이 위촉되어 학교발전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마케팅 전문가로서 학교도 홍보하고, 타 지역 학교와 교류하는데도 힘을 써 후배들이 잘 성장하도록 돕고 싶었다고 했다. 실제 그는 많은 돈은 아니지만 연간 300만 원 정도는 결식아동을 위해 예산을 지원하며 어디에 있든 그가 속한 지역사회를 돌본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말이다. 그는 기관에는 기부하지 않고 직접 어려운 아동들을 찾아 도움을 주는 선한 이웃이다.     

 

학교 운영위원회에서 아옹다옹한 이후로 그는 위원회에서 해촉 되었다고 했다. 소위 잘린 것이다. 회의자료를 보고 궁금해서 질문한 것인데 자신이 그렇게 공격을 받아야 하냐고 분풀이를 한다.      


위원이 돼 가지고 왜 자발적 들러리를 하냐는 거죠. 내가 들러리로 위촉되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어요”     


학교가 그를 위원으로 선정한 것이 그들에게는 잘못된 선택이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동양철학을 전공한 그는 정의감, 후배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 그리고 인간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자다.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이야기하다 눈물짓기도 하고, 가슴 아파 고통스러워도 한다. 마치 유신 정권 때 대학생들이 모두 거리로 뛰쳐나와 민주화를 외치며 죽음도 무릅쓰고 결사항쟁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 누구도 우리 사회의 적어도 내가 사는 지역의 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아요. 내가 사는 곳이면 내가 낸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아요? 내가 낸 돈이 잘 쓰여야 재정이 건전하고, 그래야 국가도 있죠. 그런데... 다들 제 말이 맞다고 해요. 그렇지만 표면에 드러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해요.”     


“그렇죠...”    

 

“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가슴이 너무 아파요. 어떻게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머리가 안 좋으니 문제에 매몰되어 생각하게 돼요. 함께 해야 해요. 그런데, 다들 두려워해요. 그들 눈에 거슬릴까 전전긍긍하네요”     



그렇다. 어떤 이들에게는 정치인이 S&P500에 들어가는 우량주이다. 그런 우량주를 스스로 깎아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개인에 대한 것은 스스로 결심하고 행하면 되지만, 집단은 이해관계로 얽혀있어 옳고 그름으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약자가 강자를 이기기가 쉽지 않으니 보통의 사람들은 아예 포기를 한다. 싸워서 받아야 할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알기 때문에 자발적 외면과 자발적 들러리를 선택하는지 모른다.    

 

나는 그에게 그래도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마하트마 간디가 대영제국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이길 것을 예견했겠냐고 말이다. 포기만 안 하면 방법은 있지 않겠는가. 바늘이 실을 꿰어 들어가려고만 한다면 엮을 수가 있듯이 포기만 안하면 된다. 선한 일을 해놓고도 고민하고 아파하는 그가 오늘따라 안쓰럽다.      


“우리 국민이 촛불시위를 했을 때 위대하다고 생각했어요. 진정한 민주시민이구나 하구요. 그런데 보니 이건 아닌거에요. 얼굴이 가려지고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으니 군중의 물결속에서  조용한 혁명에 동참했던 거에요. 얼마나 비겁해요?”     


분에 찬 그가 서러움에 말을 토해낸다. 비겁하기 보단 두려움이 더 커서는 아닐까. 두려움에 맞설 용기가 부족하고, 또 강자에게 이겨본 적이 없으니 자발적 포기를 한 것은 아닐까. 실상 두려움은 실체가 없는 그저 감정의 상태일 뿐인데...말이다.      


한참을 용광로 퍼붓듯 쏟아내고 난 그가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는지 멋쩍어하며 전화를 끊는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어쩌면 온전한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두려움에 그 길을 택하지 못하는 이들의 연약함까지 감싸안을 더 큰 사랑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학습하게 할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생의 품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