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라는 녀석’의 진실에 대하여
그럼에도 실체는 존재한다
언제나 미안하다 했는데 그게 맞을까
“부부싸움 같은 건 안 하시니 아실턱이 없으시겠죠?”
오랜 지인의 뜬금없는 질문이다. 두 달 후 계획된 조기 은퇴를 앞둔 그는 요즘 예정된 이별을 앞둔 연인처럼, 그리고 아주 멀리 떠날 채비를 하듯 미련 없이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못다 한 대화를 건넨다.
그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너무도 어린 시절 깨달아서 평생을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고 했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30년 이상을 살면서도 아내와 다투기라도 할 지면 하루 해가 지기 전에 먼저 미안하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런데 30년을 살아보고 지난날을 되돌아보니…단 한 번도 아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고 했다.
잘잘못을 떠나 다투는 것이 싫었던 그는 그저 서로를 미워하거나 서운해하는 그 자체가 싫어서 아내건 자식이건 부모건 동료건… 누구에게 건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를 건넸단다. 그런데 이렇게 30년을 살고 어느덧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들어서면서 과연 무엇이 옳고 그를까에 대한 실체적 고민이 들더란다.
삶의 언덕에 올라본 사람이라면
사실, 나 역시 그만한 세월의 언덕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요즘 그런 생각이 부쩍 든다. 옳고 그름이라는 것, 선과 악의 기준이라는 것. 그런 것을 추구하는 삶이 정말 맞을까?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밀려온다. 그렇지.. 그런 생각 한번 안 해본 사람이라면 어쩌면, 어쩌면 삶의 언덕을 제대로 올라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말은 그리하면서 내재된 양심의 순리로 옳지 못한 일을 하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니 완전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하늘을 의식하며 살았던 나의 지난날이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해도 상관없었지만 나의 양심과 나를 감찰하시는 그의 눈길을 의식하며 살았던 나의 삶이다. 그만 괜찮다고 하면 뭐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결국 그의 앞을 인생은 누구나 지나가야 하니 말이다. 인생 마지막 날에는 말이다. 그것이 나의 신념이었고 믿음이었고 존재하는 힘이었다. 그러함에도 삶의 무게가 실릴 때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때가 문득문득 있다. 후회는 없지만 회의감이 밀려올 때도 있었고, 좌절하지는 않지만 상실감에 아플 때도 있었다.
우리가 본 게 과연 실체일까
“왼손에 든 휴대폰을 찾기 위해 오른손을 움직이고, 냉장고에 넣어둔 휴대폰을 못 찾아 안절부절못하는 너와 내가 지금도 누가 옳은지 틀린 지 다투는 게 맞을까? ‘내가 언제 그랬어?’라고 말하는 네가 모든 것을 기억한다고 자부하니?”
그는 어제도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어제 일을 제대로 기억도 못하는 우리가 서운한 것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그리고 과거의 것을 끄집어낸다는 것이 과연 맞을까요?’라고 나에게 묻는다.
“아내가 기억하는 저의 잘잘못이 과연 맞을까요? 평생을 살면서도 단 한 번도 아내에게 사과를 받아보지 못했어요. 그런 걸 바라지도 않아요. 사랑해서 결혼했고 평생을 살았어요. 그런데 휴대폰 하나조차도 어디에 둔지 기억도 못하는 나이가 되어서 서로의 서운함에 대해 본인의 기억이 맞다고 주장하는 게 과연 맞을까요? 그게 실체일까요?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의 말이 참 공감되었다. 바라보는 관점과 시각이 너무 중요하니 말이다. 서운함은 항상 밀려온다. 특히, 기대가 많을수록 사랑할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나 사랑하기에 각도를 관점을 달리해서 사방팔방 바라봐야 서로를 지켜줄 수 있는 것 같다. 사랑은 하는 것보다 지속하고 지켜가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 감정은 쉽게 표현할 수 있지만, 그것을 삶으로 사랑으로 지켜가기 위해서는 인내와 믿음이 필요하다. 사랑의 믿음이라는 것이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실체를 오인하지 않기 위해서는 너무 중요하다.
“어쩌면, 어쩌면… 제가 바라보는 아내가 제가 알았던 또는 적어도 제가 사랑했던 그녀가 아닐 수도 있어요. 너라는 실체가 실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죠..”
멋쩍게 웃는 그의 미소 뒤로 인생의 깊이와 삶의 무게가 묻어난다. 살아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자 고백이다. 과연 실체라는 것은 무엇일까? 유리잔에 맥주를 부으면 거품이 8할이다. 그 거품이 가시고 나면 실제 맥주는 2할밖에 되지 않는다. 거품이 가셔야 실체를 볼 수 있고, 포장을 벗겨야 내면을 볼 수 있다. 실체를 보려거든 볼 수 있는 시력과 실력이 갖추어져야 한다.
실체라는 녀석의 진실
나 역시 젊은 날에 그리고 지금도 실체라고 주장하며 믿었던 순간들이 많았을 것이다. 실체라는 녀석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현상은 하나인데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과 해석은 다양하다. 그것을 실체라고들 하는데… 결국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비워질 때 그 실체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때 비로소 그의 시각으로 실체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보고 싶은 것들이 참 많고 알고 싶은 것들도 참 많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도 내가 아는 만큼 깨달은 만큼 나의 실력대로 볼 수 있게 된다. 마치 산을 등반하듯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듯 말이다.
아는 만큼 보는 만큼 깨달은 만큼 볼 수 있는 그 실체. 그래서 인생의 황혼 녘에 이르면 모두가 하는 말이 동일한지도 모른다. 인생이라는 것이 ‘많은 것이 필요 없다는 말. 진실되게 온전하게 사는 것’ 이런 것들 말이다.
아등바등 살기보다 하루를 살아도 농밀한 행복과 벅찬 기쁨으로 살아내는 것!
미련도 후회도 없이 온전하게 살아가는 것!
이러한 삶이 과연 이루기 힘든 삶인 것일까?
나는 진실로 생각이 깊어진다.
실체를 알기 위해 또는 어쩌면 이루기 위해 나는 오늘도 깊이 생각하고 마음을 추슬러본다.
처음 가졌던 마음처럼, 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사람은 착오가 있으나 그는 착오가 없으며
사람은 속일 수 있으나 그는 속일 수가 없으니
그러나, 더욱 사랑하며 용서하며 인생을 더 깊이 살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 실체가 무엇이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