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 생활 중 내게 활력이 돼준 동기 두 사람
2023년 새해를 코앞에 두고 차 사고가 났다. 다행히 어디 부러진 데 없이 멀쩡한 것만도 참말로 감사한 일이다. 차는 반쪽이 찌그러져 즉시 공장으로 입고되고 속에서 골병이 든 나는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병원생활 경험이 많다 해도 가기 싫은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배정받은 병실에는 18세 꽃띠 공주와 나보다 한 살 적은 여인이 앞서 자리를 잡고 있다.
"어디서 왔니껴? 말투도 여기 사람이 아닙니더. 맞습니꺼?"
"네, 여기 사람은 아닌데 춘양 살아요."
여기서부터 그녀와의 동거 아닌 동거가 시작되었고 그렇게 우린 다섯 밤을 함께 하고 있다.
그녀와 나의 공통점은 머리, 목, 어깨, 허리가 두들겨 맞은 듯 아프다는 것이며 차이점이라면 나는 팔다리도 쑤신다는 것이다. 골골한 그녀와 나는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아이고' 소리를 합창했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슈퍼맨을 주문했다.
"언니, 슈퍼맨 하입시더."
"무슨 슈퍼맨요?"
"슈퍼맨 몰라요 슈퍼맨? 거 팔다리 쭉뻗고 고개쳐들고 하는 자세요. 배깔고 누워서 날아라! 슈퍼맨하면 허리가 쫙 펴지면서 시원합니더. 해 보이소!"
날아라! 슈퍼맨 얼마전 허리수술을 한 그녀는 매일 시간이 날때마다 이렇게 슈퍼맨을 한다며 나에게 슈퍼맨을 가르쳐준다. 슈퍼맨 체조도 좋지만 그녀는 아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얼마나 큰 유쾌함과 기쁨을 주는지를 말이다. 그녀는 귀여운 슈퍼맨이다.
ⓒ 픽사베이
의사 선생님의 아침 회진이 끝나고 우리가 슈퍼맨을 열심히 하는 동안 간밤에 외박나간 18세 우리 공주가 돌아온다.
"어, 밥이 왜 두 개네?"
어린 양 찍찍 흘리는 목소리다. 우리 둘은 동시에 쳐다보고 웃는다. 간밤에 외박나간 줄 몰랐던 우리가 공주의 식판을 공주 침대에 올려두었던 것이다.
"킥킥. 몰래 외박하고 왔으니까 엊저녁, 올 아침 해서 두 개지. 공주! 니 어제 뭐 했나?"
"저 밤새 술 먹고 놀다 왔어요."
솔직한 꽃띠다.
"엔빵했나? 오빠야는 어데 가고?"
18세 공주와 공주의 오빠야는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어 매일 밤낮으로 병원 라운지에 붙어 다닌다.
"오빠야는 해보러 갔어요. 저 이제 스무 살 성인이 됐어요!"
"그래, 공주. 니 성인 됐다고 어젯밤에 성인식 했나?"
"네, 술 먹고 재밌게 놀았어요."
앳된 목소리에 방실방실 웃는 우리 18세 공주의 말에 그저 웃는다.
"공주야. 니 밥 두 개 다 먹으래이. 냄기지 말고!"
"저거저거! 아이고.... 언니 우린 슈퍼맨이나 하입시더."
우리가 이런 대화를 하는 사이 공주의 오빠야는 여자만 있는 우리 병실을 들락거린다.
"공주야, 오빠야가 기다린다. 퍼뜩 나가라. 침대 밖으로 빼주까?"
그녀의 유쾌한 딴지다.
오전 치료가 끝나고 환자들이 잠이 들었는지 라운지에 고요함이 흐른다. 창으로 스며드는 겨울햇살을 쪼이며 평온함을 즐기는 것도 잠시 어디선가 파닥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슈퍼맨! 그녀다.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달려오는 것이다.
"어머머…. 어머어머! 언니 언니 어떻게 하지?"
"왜요? 무슨 일이에요?"
"언니, 내가 아 글쎄. 말을 못 하겠네.... 어떡하지? 내가 범인이라고 뒤집어쓸 것 같아. 어떡해, 어떡해."
그녀는 숨이 꼴깍 넘어가기 전 팔딱거리는 고등어같이 발을 동동 구르며 흥분해 있었다.
"말을 해! 말을."
"있지. 언니.... 어떡해. 내가 화장실에 가서 변기 뚜껑을 열었는데 글쎄, 안에 뭐가 있길래 뭐지? 하면서 물을 한번 내렸어. 근데 갑자기 뭐 누르스름한 주먹만큼 굵고 큰 것이 동동 떠오르는데.... 어떡해 어떡해! 내가 범인이라고 할 텐데.... 언니, 여기서 화장실 간 사람 본 적 있나? 내가 마지막에 본 사람은 저 공주인데. 공주 저것이 맞아. 틀림없어!"
"일단 다른 층으로 가고 수습을 해보죠. 행정실이나 간호사실에 전화해보죠."
그녀는 숨을 까닥거리는 고등어같이 더 파닥거렸고 그런 사이 간호사 선생님이 '뻥뚫어'를 했다. 사건 수습 후 그녀는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변기 2절을 읊기 시작한다.
그녀의 애플망고 슈퍼맨, 그녀가 묘사하는 화장실에 있던 문제의 그것이다. 색깔도 곱고 맛도 좋은 애플망고! 생각하기에 달려있다더니 그 말이 참으로 맞다 ⓒ 픽사베이
"언니, 고 발칙한 것. 이것이 막혔으면 지가 간호사실 가서 '뻥뚫어'를 빌려다 해야 예의지. 고거 아주 굵은 것이 아마 싸다가 똥구녕이 분명 찢어졌을 거야. 이 괘씸한 것. 언니 그 애플망고 있잖아요. 그 노래가지고 쫙 펴있는.... 고만한 게 그렇게 생겼다니까?" 수사관처럼 눈빛을 반짝이는 그녀는 귀여웠다. 커피 한 잔 하고 싶던 생각은 저만치 사라졌다.
그녀는 참 솔직하고 담백했다. 컵라면을 야식으로 먹고 병실이 이제 집처럼 편안한다는 그녀! 그녀로 인해 타지의 병동 생활이 유쾌하다. 우리의 병원 생활이 언제까지일진 알 수 없으나 그녀 때문에 통증도 잠시 잊을 수 있고 웃을 수 있다. 그녀는 이 병실의 슈퍼맨이다.
살다 보면 예기치 않는 사고가 일어난다. 특히나 새해를 앞두거나 명절 등 특별한 날이면 '왜 사고가 났나' 싶은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면 그리고 자신을 들여다보면 슈퍼맨이 항상 자리해있으니 삶은 그래도 살만한 것이다. 아파도 슬퍼도 조금 낙심이 되어도 '슈퍼맨!'하고 마음의 기지개를 쭉 켜면 힘이 오지 않은가!
인생이 겨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있기에 겪는 또 겪어지는 것들이다. 밤은 깊어가고 허리는 아파온다. 아! 슈퍼맨!
덧붙이는 글 | 내 몸도 마음도 나의 것인데 내 마음대로 되지가 않지요? 저도 그렇답니다.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바람도 불어오지만 낮과 밤이 있듯 삶에는 늘 반전이 있기 마련인가 봅니다. 슈퍼맨처럼요. 초능력을 가진 그런 수퍼히어로는 아니지만 추운 겨울 빈속을 채워주는 호빵처럼 그런 온기를 가진 인생들이 있어 또 다른 측면의 삶을 즐길수가 있는가 봅니다. 지금 이 순간 힘이 드시나요? 염려마세요. 그대 곁 슈퍼맨이 되어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