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질량 검사를 했는데 근육 부족이었다. 근육이란 것을 늘리기 위해서는 버텨야 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의자에 앉은 것 같은 자세를 만들었다. 트레이너는 그 상태 그대로 버티라고 했다. 하나, 둘, 셋, 그는 천천히 수를 셌는데 열까지만 참아보자고 했다. 일곱쯤 되니 이마에 땀이 나기 시작하고 버티는 허벅지는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덟, 아홉을 지나고 드디어 열이 되나 했는데 그가 아홉을, 아~~~~~~~~~~~~ 홉~~~~~~~ 이러는 것 아닌가 (죽일까)
결국 난 아홉~~~~~~~~~~~에서 젖은 빨래처럼 쓰러져버렸다.
시키는 운동을 다 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근육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게를 버티고 중력을 버티는 운동을 매일 해야 한다. 매일 운동을 하러 간다는 것은 근육을 만드는 일을 선택한 것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는 일이다. 나는 운동하기를 선택했고 근육량이 늘지 안 늘지는 모른다. 어떤 결과이든 그것을 수용하는 것도 나의 책임이다. 또 게을음이 찾아와 운동을 지속하지 않고 중단하게 되는 것도 내 선택이다. 만약에 헬스장이 무너져서 더 이상 운동을 갈 수 없게 된다고 해도 나는 다시 선택할 수 있다. 다른 헬스장을 알아보던가 다른 운동을 알아보는 일이 그렇다.
선택권은 나에게 있다.
선택에는 물리적인 선택과 정서적인 선택이 있다. 물리적인 선택의 배경에는 정서적인 선택이 있으며 마음의 근육은 선택과 책임에서 생긴다. 책임진다는 것은 회피하거나 합리화를 하거나 남 탓을 하거나 상황 탓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린 선택의 결과가 좋든 나쁘든 그 결과를 내가 한 선택의 결과로써 수용하는 것이다. 자책과는 다르다.
선택에 따른 책임은 내 것이다.
자기가 내린 선택에 대해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면 선택을 했으면서도 선택했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고, 뒤따라 오는 결과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이상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내가 내린 무의미한 선택으로 채워지게 된다. 삶이 텅 빈 집처럼 공허해진다. 책임감은 나를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살아갈 수 있게 만들고 내 삶을 나의 것으로 만든다.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주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한다.
원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는 경우에도 나에게는 정서적인 선택권이 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마음의 방식은 분명히 있다. 선택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일 때, 마음의 근육량은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