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진실

나를 위한 몸짓

by 흔들리는 민들레



거추장스러웠던 옷을 벗어던졌다.

모든 감정들을 보았고, 받아들였고, 흘려보냈다.

그리고 가벼워졌다.

나를 짓누르던 모든 감정들을 벗어버리고 나니,

어색한 내가 되었다.




이게.... 나라는 사람이구나...





손으로 나를 만져보았다.

가벼운 몸짓이 느껴졌다. 색다른 감각이 찾아들어서 멈칫거렸다.

조심스럽게 나를 탐색했다.




나는 나와 함께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에 빠져 들었다.

나는 나와 함께 `여인의 향기` 에 맞춰 춤을 추었다.

나는 나와 함께 잔나비의 "she"를 따라 불렀다.

나는 나와 함께 좋아하는 밀크티를 마셨다.

나와 함께 쇼핑을 하기도 하고, 나와 단둘이서만 꽃길을 걷기도 했다.

목적과 용건이 없이,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손 맞잡고 산책을 하듯이, 사랑하는 사람과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듯이 이야기 나눴다.





남과 여가 조심스럽게 서로를 알아가듯이 나도 나를 조심스럽게 탐색했다.

막다른 길에 다다른 듯한 다급함과, 끝없이 이어지는 줄 없는 번지점프 던져진 공포감은 사라지고, 고요한 나 자신만이 남았다.

행복했고 충만했다. 나로서 충분했다. 세상의 그 어떤 지위도 필요 없었다. 세상의 어떤 사랑도 필요 없었다. 그저 나 하나면 되었다. 나 하나가 온 세상을 채운듯했다.

혼자라는 게 두렵지 않았고, 혼자라서 행복했다.

나를 둘러싼 껍데기는 중요치 않았고 내면의 목소리가 중요했다. 내면이 느끼는 감정이 중요했다. 평화로운 고요가 나를 채웠다.

나는 "나"와 함께했다.





나를 듣다.




잠시 딸, 아내, 엄마, 며느리, 모든 옷을 내려놓고,

나로만 존재하는 시간들을 가졌다.

하루의 어느 순간에 그 역할들을 알맞게 해냈고,

나로 돌아와 내 목소리를 들었다.

나의 솔직한 감정을 듣고 또 들었다.

일상의 순간에, 나는 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 왜 그런 기분이었을까를 물었고, 들었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다 보니 타인을 비난할 겨를이 없었다.

나를 사랑하기만도 부족한 시간에 불만을 쏟아낼 겨를은 더더욱 없었다.

가족을 비롯한 타인에게 화가 날 때는, 그들을 비난하는 대신 나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 들여다보았다. 나를 존중하기 시작하니 타인의 감정 또한 존중되었다.

내게 감정의 자유가 있듯, 그들 감정의 자유도 인정했다. 그것은 때로는 어렵기도 때로는 과거의 모습을 띠며 불안정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넘어지면 넘어진 대로 넘어졌구나, 서투르면 서투른 대로 서툴렀구나 인정했다.






"나" 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내가 아니다. 내가 바라던 나도 아니다. 내가 꿈꾸던 나도 아니다. 그저 나다.

서투르고 모자라고 볼품없어도 나이기 때문에,

그저 나라서 받아들인다.

대단한 딸도, 맘 넓은 아내도, 이상적인 엄마도, 용돈 두둑이 챙겨주는 며느리도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역할의 일부일 뿐이다.

사랑하는 이들의 인정을 받아서 내가 되는 게 아니다. 내가 인정하기 때문에 내가 된다.

그럴듯한 성공신화를 보며 패배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심은 "나" 에게 있기 때문이다.

대단한 이들도 내겐 타인에 불과하다.

나는 그 어디에도 없을 나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창조해 나간다. 나는 존재 자체로 내가 된다.

존재의 거짓말이 아니라 존재의 진실이 된다.





높이에서 깊이로.




토마토나 키가 큰 나무들도 빛의 방향으로 올라가는 동시에 뿌리를 내리지만 그럼에도 우리 인간의 삶에 대한 은유는 주로 유기체의 움직임 가운데 유독 상승하는 기관에 관심을 두는 편이다.

심리학자 제임스 힐먼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中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좌절이나 실패를 하강 상승 이라 명명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패배감이 상승이라면,

그것이 실은 성장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나쁠 것도 없다. 그렇게 슬플 것도 없다.

그렇다. 나는 하강 상승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