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간 그 엄마와 딸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아기와 남자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엄마는 왜 세명의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있어야만 했을까... 나는 그들을 기억하는 걸까 잊지 못하는 것일까. 작은 남자아이가 동생의 유모차를 밀며 소리 없이 흘리던 눈물을 나는 기억하는 것일까 잊지 못하는 것일까.. 그 후로도 여러 날동안 그들을 기억했고 잊지 못했다. 서러운 아이의 눈물을 위로해줄 방법을 찾지 못한 데서 오는 무력감과 미안함이 여러 날 내 혈관을 타고 돌아다녔다. 나는 그 아이와 다르지 않았다. 무력했고 왜소했다.
나는 어쩌면 그 아이에게서 나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무력하고 왜소한 내 모습, 아이가 꺼져가는 촛불처럼 아픈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내 모습을 그 아이에게서 보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또 그 엄마에게서 나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너무 무섭고 두렵지만 엄마이기에 두려움을 들키지 않아야 했던 여자. 그녀의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은 맨얼굴이, 앞머리 없이 이마를 다 드러내 무심히 올려 핀을 꽂은 뒷머리가 그래서 잊히지 않는지 모른다. 나는 그녀가 엄마이기 이전에 두렵고 무섭고 외로운 여자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엄마임과 동시에 여자일 수는 없다는 것도 안다. 운명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도 안다. 누군가의 삶은 그렇지 않지만 누군가의 삶은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작은 아이는 목이 부어오르고, 계속 열이 났고, 코피를 쏟았고, 구토를 했고, 음식을 먹지 못했지만 잘 버텨주었다. 삼 주간 계속되던 열이 기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떨어졌고 퇴원 결정이 내려졌다.
너무나 기뻤지만 마음 놓고 기뻐할 수 없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둔 통제구역의 아이들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여전히 어떤 면회객들은 복도 한 구석에서 울고 있었다. 그래서 소리 내어 기뻐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해한 아이들이 아파하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아이들의 고통과 부모님들의 깊은 슬픔이 내게 닿았다.
세상에 귀하고 소중하지 않은 아이가 어디 있을까. 모든 자녀가 다 귀하다. 내 자식이 귀한 것처럼 남의 자식도 귀하다. 남의 자식이라도 아파하면 내 마음이 아프다. 그 부모가 자기 아이를 얼마나 사랑할지 알기 때문이다. 오랜 질병과의 싸움으로 언제 숨질지 모르던 아이를 병원으로 데리고 오다 차 안에서 떠나보내고 이미 빈집이 되어버린 작은 몸을 안고 응급실로 걸어 들어와야 했던 어떤 부모의 이야기를 알기 때문이다. 가망 없다는 병원의 말에 이미 여러 날 보낼 준비를 했더라도 작은 손을 놓을 수 없는 그 부모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아이가 숙제를 전혀 하지 않을 때, 하루 종일 게임만 하려고 할 때, 공부보다 노는 것에 과도하게 진심일 때, 왈칵 화를 낼 때, 말도 안 되는 떼를 쓸 때, 의사가 내게 아이의 몸 안에 악성종양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그날을 떠올린다. 그러면 지금의 모든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아이에게 마구 화를 내고 싶을 때 네 아이의 엄마를 떠올린다. 그러면 내 화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게 된다. 그들은 나의 거울이었다. 세상과 사람들은, 내 마음의 창이었고 나에게로 가는 길이었다. 나를 잃지 않는 길이었다.
아이에게 말한다. 건강하게만 자라 달라고.
이 진심이 내 안의 불안이라는 불순물로 변질되지 않도록 매일매일 걸러낸다. 맑은 마음으로 아이를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