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기가 오르니 졸음이 찾아왔다. 술을 잘 못 마시기 때문에 마셨다 하면 졸음과의 사투를 겪어야 하는데 그때가 딱 그랬다.
" 엄마, 졸려요?"
" 응... 조금... "
작은 아이는 나의 상태가 어떤지 잘 안다. 내가 졸리면 졸린 걸 알고 슬프면 슬픈걸 귀신같이 안다. 아이는 언제나 나를 보고 나도 언제나 아이를 본다. 문득, 아이가 나를 더 많이 바라볼까 내가 아이를 더 많이 바라볼까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아이와 나 사이의 시선 점유율의 비율은 어느 만큼 일까?
맥주가 얼굴을 달궈 창문을 열었다. 가을밤의 차가운 손이 양볼을 감싸니 잠시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아스팔트에 가로등 불빛이 스포트라이트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시선의 점유율이 높다는 건, 더 많이 사랑할 때 가능한 일이다. 아이와 나 사이에서 더 많이 바라보는 쪽은 돌봄을 제공하는 쪽인 나이다. 그리고 늘 그렇듯 더 사랑하는 쪽이 덜 사랑하는 쪽보다 더 많이 보게 되는 것은 상대의 앞모습보다 뒷모습이다. 그래서 짝사랑은 언제나 가슴이 아픈 것 아닌가 뒷모습만 보니까.
나는 학교에 가는 아이의 등을 보고, 친구를 만나러 나가는 아이의 등을 본다. 청소년이 되어 혼자 있고 싶은 아이의 등을 보고 엎드려 자는 아이의 등을 본다. 시험공부를 하는 아이의 등을 보고 친구와 수다를 떨며 천천히 걷는 아이의 등을 본다.
아이의 앞모습을 볼 수 있는 순간은 아이에게 내가 필요할 때다.
그러나 그것이 짝사랑과 다른 점은 가슴이 아프지 않다는 데 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아이들이 혼자서 학교에 가고, 혼자서 스터디 카페에 가고, 혼자서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는 것이 너무 기특하고 대견하다. 푸드덕 거리며 날아가는 도시 비둘기만 보아도 놀라서 달려오던 아이가 이제는 조금씩 세상을 탐색하려고 시도하고 작은 성공들을 거둔다는 것이 대견스럽고 기쁜 것이고,
어른이 되어 친구들과 여행도 가고, 깊은 사랑도 할 아이의 미래를 기대하게 된다. 이제는 나보다 친구들과 지내는 시간을 더 필요로 하는 아이에게 조금(?)은 삐질 때가 있지만 그것은 엄마로서 가지는 자연스러운 섭섭함이란 생각이 든다.
가을은 매일 조금씩 다가오지만 나는 매일 조금씩 아이와 이별할 준비를 한다.
" 치. 너 나가냐? "
" 네, 왜요~ 엄마 삐졌어요? "
" 그래, 나 삐졌다. "
내가 외출하자고 하니 귀찮다고 안 간다던 큰아이가 친구 전화 한 통에 총알처럼 튕겨나가는 것을 보며 어쩔 수 없는 섭섭함이 올라왔다. 아이는 마치 나의 삐침이 재밌다는 듯, 그러나 내가 당신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 다녀올게요~~ "를 발랄하게 남기고 사라졌다. 섭섭했지만 빙그레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나는 기꺼이 보내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던 친정엄마와 나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꺼이 대물림을 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