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죽음을 목격해 왔기에 그렇다. 제일 먼저는 아버지였고, 그 다음은 함께 살았던 외할머니였으며, 그 다음은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이었던 열여덟 친구의 죽음이었으며, 그 다음은 내 글에 대해 최초의 지지를 보내준 친구의 스물의 죽음이었으며, 그 다음은 이십 대 초반 복지시설에서 목격한 죽음이었다. 죽음의 원인들은 사고와 질병, 노화였다.
삶의 유한함과 허무함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많은 날들이 있었다. 죽음과 한 번도 분리되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죽으면 안 되는 건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해결되지 않은 질문들을 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보고 싶어서였다. 남들 하는 걸 다 해봤는데도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늘 왜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을 달고 있었으니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해왔던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들이 결코 불필요하거나 쓸모없는 고민은 아니었지만 그 안에는 중요한 타인에게 수용되어 본 적없었던 자아의목소리가 있었다.
우리는, 인간은, 자각이라는 걸 한다. 그 자각은 타인이 자기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을 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를 자각하려면 이름이 불리워져야 하고 그 부름 속에 들어있는 많은 정보로 자기를 자각하게 된다.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 범위는 더 넓어져 이 세상은 어떤 곳인지까지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자기로서 자기만의 진실이 형성되는 것이니까. 그것을 어떤 심리학자는 [현상학적 장]이라고 한다.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의 믿음만이 존재할 뿐.
나의 믿음은 <나는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그것은 나라는 사람에 대한 자각이기도 했다. 그랬기 때문에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없었고 의미 또한 그랬다. 그랬기 때문에 죽음을 가깝게 느꼈고 결국 양치하는 횟수보다 더 많이 죽음에 대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우울증을 통과하며 나만의 [현상학적 장]을, 나만의 진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한쪽으로 치우친 자아의 모습, 불균형적이고 불안정한 모습으로 비대해진 자아를 만났다. 나는 슬프고 아프게 불리워진 사람이었다.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런 자아를, 왜곡된 신념을 알아내고 난 후, 나는 변했다. 그 모습이 싫었으므로 달라지고 싶었다.
그때 나의 세상은 외롭고 쓸쓸하고 가혹하고 천길 낭떠러지만 펼쳐져 있는 피폐한 세상이었다. 버려지면 다시 재사용될 수조차 없는 그걸로 끝인 곳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제 나는 혼자일 수 있게 되었다. 사람에 대해 집착하고 좋은 대상이기 위해 애쓰던 내가 이제는 혼자여도 괜찮다 여긴다. 왜,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우울증을 통과하던 시기의 심리적인 통증은 대단했다. 그때 내게 도움이 되었던 사람은 여러 명의 친구가 아니었다. 가족도 아니었다. 나의 반경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정서적 질병에 대해 알지 못했고 도움을 줄 수도 없었다. 내가 아플 때 곁에 있어준 사람은 친구 한 명과 주치의뿐이었다. 나는 우울증을 통과하며 관계의 무상함을 깊이 깨달았다. 많은 관계들이 저절로 정리되었고 그들에 대한 내 마음도 저절로 정리되었다. 원망이나 미움이 아니라 모든 관계들이 나의 필요이자 집착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이제 나는, 애써 관계를 만들지 않는다. 인연이 닿을 일이 있다면 닿는 것이고, 인연이 다 한다면 그저 다 하는 것이다. 붙잡지 않고 보내려 애쓰지도 않는다. 이제 인연은 내 소관이 아니라고 느낀다. 인연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흐름, 운명의 흐름일 뿐이다.
흘러가는 물을 손으로 붙잡을 수 없는 것처럼 내리는 소나기를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이제 인연은 내게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