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왜 자녀를 이 세상으로 오게 했을까? 세상이 너무나 아름다우므로? 삶은 꼭 경험해야 하는 것이므로? 아이는 부모의 필요에 의해 태어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숭고한 자식사랑의 본질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실, 결혼의 결실, 또 부모의 세포를 오랫동안 전수시키는 수단에 있다. 숭고한 희생이란 실은 별로 아름답지 않은 본질 위에 포장되는 아름다운 합리이다.
자녀를 위해서 잠을 줄여가며 도시락을 싸거나, 굽은 허리로 만든 음식을 바리바리 보내오거나, 잠든 아이의 다리를 주무르며 안쓰러이 여기는 마음의 본질은 숭고한 사랑이라기보다 사회적으로 암암리에 강요된 모성이다. 처음부터 우리는 크나큰 사랑에 의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부모의 필요에 의해 세상에 오게 된 존재들이다.
다만 부모나 자녀나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뿐. 왜냐하면 그것은 아름답지 않으므로, 이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이유가 되기에 불충분하므로. 그렇기에 희생하는 부모든 그렇지 않은 부모든 자녀에게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을? 내가 원하는 네가 되는 것.
부모는 끊임없는 자기 내면의 갈등을 가진채 자녀와 싸우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굉장히 본질에 부합되는 요구이기도 하다.
우리 부모는 내게 그런 것을 요구한 적이 없다는 이가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내가 원하는 네가 되라는 요구에는 겉으로 보이는 요구 외에 무의식적 요구도 포함된다. 부모자신도 자각하지 못한 채 자신의 부모로부터 받은 규범이나 규칙들을 자녀에게 전수하고 요구한다. 우리는 그것을 다른 말로 사회화라고 한다. 우리의 부모도 또 부모의 부모도 그런 요구들을 받아왔고 전수했다. 이것은 판단이 아니라 인정이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 필요다. 그들의 필요이다. 종을 존속시키려는, 무리를 확장하려는 무의식적인 의도이다. 의도의 밑바닥에는 필요가 있다. 희생하는 부모, 그러지 못하는 무조건적인 갈망을 가진 부모의 공통분모는 표현방식만 다를 뿐 본질은 필요에 있다.
진정한 흙수저란
진정한 흙수저란
다시 흙수저의 고통스러운 삶으로 돌아가서, 흙수저는 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을까.
흙수저는 실재적 가난과 더불어 정서적 가난까지 함께 물려받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실재적인 가난은 어떻게든 남들을 보며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삶 속에서 마주하는 모든 어렵고 난해한 문제들을 어떻게 마주하고 극복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정서적인 방법들을 전혀 배우지 못했기에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요구받는다. 부모가 원하는 네가 되기를. 자기 인생을 살아나갈 정서적 기력도 없는 이들에게 그 부모는 늙어서 죽을 때까지 <내가 원하는 네가 되기를>만 되뇌다 떠난다.
<내가 원하는 네가 되기를> 에는 반드시 필요한 성찰이 부재한다. 인지가 부재한다. 자신의 내면에 <내가 원하는 네가 되기를>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 <다 너를 위해서>가 된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흙수저란 실재적인 가난을 물려받은 사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정서적인 가난을 물려받은 사람이다. 무조건적인 갈망을 물려받은 사람이다. 그것은 인지나 자각이 없다는 면에서 굉장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나라는 흙수저에 대한 인지와 자각이 더 깊어진 것은 우울증을 통과하면서부터였다. 정서적 가난을 대물림하는지도 모르고 있던 나의 부모, 그것을 물려받은지조차 몰랐던 나 자신에 대한 인식과 자각은 고통스러운 우울로서 생겨났다.
우울증은 나를 무지의 상태에서 앎의 상태로 이끌었다. 대물림된 무조건적인 갈망의 상태를 자각하게 만들었다. 나는 과거나 지금이나 가난한 글쟁이지만 정서적으로는 훨씬 부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