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의 권력구조는 그 집단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다.결혼은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그 말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것이 개인에 대한 침해처럼 여겨진다.
개인을 집단 안의 필요로서 존재시키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회와 국가의 구성원이 개인이기는 하지만 부품은 아니기 때문이다. 연대와 사랑으로 존재해야 할 개인이 필요와 수단으로 대해지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진다.
시댁이라는 곳은 시아버님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가부장제에 권력의 뿌리가 있었고 그 권력은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견고하게 쌓아져 온 성과 같이 단단했다. 그 고집스러움과 강퍅함의 높이가 성과 같이 높았다. 한 인간의 세월은, 사회규범은 그렇게 모든 것을 건설했다.
그런 곳에 진입한 나는 작은 문지기에 불과했다. 성문을 열라면 열고 닫으라면 닫아야 하는 말단 보초였다. 나만의 생각과 나만의 우주를 보유한 한 인간이 아니라 그 집단을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작은 보초. 상견례가 끝나고 시어머니가 한 말을 통해 그것이 증명된다. 안사돈의 손을 보니 일을 많이 해보았고 잘하는 손이더라는 말, 그것은 내 아들과 평생을 함께 할 배우자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집의 노예나 일꾼을 뽑을 때 쓰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그때는 그 말속에 숨은 의미를 몰랐다. 착하고 순진했다. 아니, 미련하고 바보 같았다.
남자와 여자의 밥상을 따로 차리는 그 문화는, 그런 문화 안에서 자라온 사람은 그것의 이상함을 결코 알지 못한다. 그 제도가 얼마나 부당하고 불합리한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다수가 소수에게 가할 수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에 대해 알지 못하고 다수가 소수를 보호하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가 다수에게 맞춰야 하고 약자가 강자에게 맞서는 것이 아니라 약자는 약자이므로 강자에게 맞춰야 한다고 여긴다. 다름에서 오는 차이를 이상하다 여기며 그 차이는 약자와 소수가 알아서 맞춰가야 하는 것이라 여긴다. 게다가 그것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 평등중심이 아니라 전적인 서열중심이다. 권력을 기반으로 한 서열중심에 유연성은 있을 리가 없다.
오랜 시간 그 문화를 이방인으로서 지켜봐 온 나는
외로움의 긴 시간들과 싸워야 했고 올라오는 내면의 분노와 싸워야 했다. 지속적으로 화가 났고 지속적으로 우울했다. 한 인간이 우울한 데에는, 그 원인은 복잡한 인과관계가 작용한다.
남편은 그런 내가 이상하다고 유별나다고 했다. 그러나 우울증을 통과하고서 알게 된 것은 내가 강한 내면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내가 약해빠진 존재라고 생각했다. 헐벗고 누추한 존재라고 생각했고 짐이 되고 누가 되는 존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진짜로 헐벗은 존재는 부당함 속에서 부당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며, 우울한 환경에서 우울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며, 분노해야 할 상황에서 분노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다.
진짜로 헐벗은 사람은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한 사람인 것이다.
왜? 라는 질문
왜?라는 질문
누구도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강력한 가부장의 권력사회에서 내가 견뎌내야 했던 것은 그 서열과 권력이 시아버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장자, 즉 큰아들에게까지 있다는 사실이었다. 시아버지는 장자에게 권력을 부여하고 있었고 권력을 부여받은 장자는 부여받았으므로 권력을 행사했다. 권력의 물줄기는 장자의 배우자에게도 흘렀고 곧 장자의 아들까지 이어졌다.
나는 그것을 보았고 느꼈지만 그들은 전혀 그에 대해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들에게 그것은 맞춤옷이었다. 누구도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왜?라는 질문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나 혼자였다. 남편은 정말 해맑게도 왜라는 질문이 왜 필요한데? 하는 식이었다. 그 무(아무것도 없음)가 정말 경탄스러웠다.
나는 남편에게 계속 질문했다.
왜 우리는 큰 상과 작은 상으로 나뉘어져야 하는 것인지,왜 꼭 누군가가 대장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왜 대장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인지,왜 남겨지고 버려지는 음식들이 많은지,
왜 내 집에 돌아오겠다고 하는 것에 대한 눈치가 있어야 하는지,왜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지, 왜 내가 못하는 일에 대한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왜 다름을 수용하지 않는지,
왜 나는 인격이 아니라 기능이어야만 하는지,
그런 질문들에 대해서 남편은 대답했다. 원래 그러니까. 그래 왔으니까. 남들도 다 그러니까.
우울증은 내게 질문하게 했다. 보다 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가족들에게 했다. 내 질문은 외부를 향한 것만이 아니라 내부에서 시작된 것이었고 그 시작점은 우울증이었다. 이미 가슴속에서 찰랑이고 있던 질문들을 넘치게 한 것은 바로 우울증이었다.
이제는 권력구조에서 벌어지는 명령에 지배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며 나는 그들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만을 존중하는 것은 아니다. 소중한 내 시간을 낭비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변할 수 없고 결코 질문하지 않으리란 것을 안다.
우울증을 통과하는 순간에 나는 무수한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은 분노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과 나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권력과 권위가 다른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권력과 권위를 내게서 얻어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줄 것이 아니므로. 이것은 적대감이 아니라 받아들임이다. 그들이 결코 하지 못할 일을 나는 우울증으로 해냈다. 내가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