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이라는 감정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너무 아팠으므로. 너무 아픈 상처는 소독하는 것조차도 어렵지 않나. 그냥 대충 밴드 같은 걸로 덮어 놓으면 괜찮아지리라 여겼던 건지도 모른다. 우울, 슬픔, 분노 같은 감정들이 바늘처럼 마구 나를 들쑤셔도 아닌 척,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심도 깊은 여러 질문들이 목구멍으로 올라올 때마다 꾹 눌러 삼켰지만 삼켜지지 않는 알약 같았다. 삼킨다고 삼켰는데도 삼켜지지 않을 때면 토하듯이 글을 썼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감정들이 [산다는 것은 흔들리는 일이다]와 [뜨겁게 이별하고 차갑게 사랑하라]에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산다는 것은 흔들리는 일이다]는 정신과 상담기록이며 [뜨겁게 이별하고 차갑게 사랑하라]는 나 자신과의 이별기록이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이렇게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
한 사람이 우울한 데는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한다. 사회, 경제, 문화 모든 것에서 영향을 받는다. 수많은 요인들 속에 놓인 우울한 감정들을 지속적으로 들여다보다 보면 결국 본질이라는 종착역에 다다르게 된다. 우울은 표면일 뿐, 본질은 더 깊은 곳에 숨어있는데 그것을 탄광에서 캐내듯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발견한 우울의 본질 중 하나는 상실이었다.
어떤 상실이었을까? 부모의 상실이었다.
위에서도 말했듯 한 사람의 우울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인간을 규정하고 명칭을 붙이는 어떤 표현이든 좋아하지 않고 사용하지도 않지만 이해를 위해 나는 가난을 물려받았으며 부모로부터 큰 도움을 받지 못한 자녀라는 의미인 흙수저라는 명칭을 불가피하게 사용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지금부터 이야기하고자 하는 중심은 이 <부모로부터의 도움>이라는 것에 내포된 경제적인 부분이 아니라 정서적인부분에 있다.
실재적인 가난은 눈에 보이므로 어려울지라도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다. 그러나 정서적인 가난은 눈에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으므로 어떻게 해야 가난을 해소할 수 있는지 자각하기 어렵다는 면에서 실재적인 가난보다 더 큰 문제를 만든다. 인생을 훨씬 어렵게 만든다. 정서적인 가난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터질지 알 수 없는 시한폭탄을 지닌 것과 다르지 않다. 시한폭탄을 보유한 채 살아가므로 불안하지않을 수가 없는 것이고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지없는 가난, 성찰없는 가난은 무조건적 갈망을 낳는다.
인지 없는 가난, 성찰 없는 가난은 무조건적인 갈망을 낳는다.
나의 부모는, 더 정확히 나의 모친은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정서적인 가난을 보유하고 있는 분이었고 그래서 나에게 정서적인 유산을 물려줄 수 없었다. 물려줄 것이 없었다. 실재적 가난보다 정서적 가난이 더 무서운 이유는 늘 허기진 상태이므로 그것을 채우려고 한다는 데 있다.
텅 빈 항아리에서 무언가를 퍼담기 위해 계속 항아리 바닥을 긁어대서 결국 금이 가고 파열이 일어나게 되는데도 결코 알지 못한다. 자기는 항아리를 한 번도 채운적이 없음을. 왜 없는가만 한탄하고 분노할 뿐이다. 그 빈곤한 갈망들을 스스로 채우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녀가 항아리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무엇이든 채워져 있는 항아리... 무엇이든 만들어주는 화수분처럼 자기의 갈망을 채워주기를 바라게 된다.인지 없는 가난, 성찰 없는 가난은 무조건적인 갈망을 낳는다.
나는 정서적 유산을 받지 못한 흙수저이다.
이런 흙수저는 존재자체가 고통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인 연료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없는 연료를 지속적으로 착취해가려고 하는 무조건적인 갈망을 가진 부모가 곁에 있기 때문이다. 흙수저의 고통스러운 운명의 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다. 돈이 없어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갈망을 가진 부모가 곁에 있어서 고통스러운 것이다.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그래서 자기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 아이는 그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상실의 경험을 시작하게 되므로 그렇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어쩌면 불편한 감정이 올라올지도 모른다. 고생하고 희생해서 나를 키워준 부모, 그 희생과 노고를 무조건적인 갈망을 가진 부모와 분리해 생각하고 싶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정말로 둘은 분리될 수 있을까? 과연 우리의 부모는 숭고한 희생정신만을 보유하고 있을까? 그 희생은, 그 희생의 본질은 사랑이기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