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오며 내가 받았던 교육의 골자는 줄 세우기였다. 교육기관에서는 1등부터 꼴등까지, 좋은 형편의 학생에서 나쁜 형편의 학생까지, 좋은 학교에서 안 좋은 학교까지, 사회에서는 좋은 직장에서 안 좋은 직장까지, 높은 서열에서 낮은 서열까지, 좋은 직업에서 안 좋은 직업까지, 땅도 있다. 좋은 지역에서 나쁜 지역까지, 좋은 집에서 나쁜 집까지, 이코노미에서 퍼스트 클래스까지..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나는 그런 세계에서 살아왔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고기에 등급이 매겨지듯 서열과 등수가 매겨졌다.
그렇게 살며 어버버 하다 보니 어느새 중년이 되어버렸다. 어느 날, 회의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공허함과 열등감이 우울과 함께 찾아왔다.
내가 누구인가.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끝내주는 저항정신을 가지고 우리 땅을 지키던 한민족의 후예가 아닌가.
거부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매기는 등급을, 온 세상에 퍼져있는 등급제를.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내면의 동의를 알아차리는 일이 우울증 때문에 가능해졌다. 우울하다는 것은 어쨌든 신호이니까. 그래서 마음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도를 닦는 심정이 되었다. 아예 단절되어 산다면 모르겠으나 어쨌든 나는 세상에 있지 않나.
어떤 이들은 내게 말했다. 아이들 교육을 생각한다면 빨리 그 지역을 벗어나라고. 서울이 아닌 곳에 사는 내가 위기감과 다급함을 가져야 한다는 듯이 말했다. 위기감도 다급함도 없는 나를 그들은 세상물정 모르는 답답이로 대했다. 그들과 대화 후 내 안에 싹튼 불안함을 보았다. 나 역시 줄 서기에 익숙해져 있어 세상의 관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불안하기 때문에
불안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줄을 서라>이다. <나도 섰으니 너도 서라 >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내게도 줄을 서라고 하는 것일까? 진심으로 나를 아껴서?
불안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줄을 서길래 나도 섰는데 아무래도 불안하다. 그러니까 너도 서라.
내 선택이 좋은 선택이기를 바라니까. 그러나 미래는 알 수 없으므로 여전히 불안하다. 그러니 그 불안을 누군가에게 주면 잠깐은 괜찮아지니까. 줄을 안 서고 있는 이에게 주면 잠깐동안은 좀 나으니까. 그래서 원하지도 않는 이에게 그 불안을 턱 하고 안긴다. 그러곤 말한다. 서둘러.
본질은 줄을 섰음에도 불안하다는 데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의 불안을 모른 척한다. 그래야 자기의 선택이 좋은 선택이 되니까.
줄 서기에 저항하고 싶다. 개성대로 살고 싶다. 내 개성이 판단되거나 평가되는 것이 안타깝고 싫다. 줄의 맨 앞에 있는 사람의 삶도 본질적으로는 나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진다 해도 크게 행복해 질지는 미지수라는 따위의 식상한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보편이 아니라 고유이다.
나만의 길, 내가 선택한 길, 내가 사랑하는 길, 내가 개척한 길을 원한다. 남들이 가는 길 말고, 남들이 좋다는 거 말고 내가 좋은 것을 원한다.
우리의 유전자에는 불안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개체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감정이다.
불안을 없앨 수는 없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영원히 불안할 것이다. 그 불안은 어떤 선택을 해도 따라올 것이다. 줄을 선다 해도, 그래서 맨 앞으로 이동한다 해도 살아있는 한, 또 다른 종류의 불안과 반드시 마주하게 될 것이다. 본질은 줄을 섰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불안이다.
나 역시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불안을 제대로 느끼고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것이 반드시 내부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한 사람이 우울하거나 불안한 데는 굉장히 광범위한 원인적 요소들이 있으니까.
지금의 나는 불안을 느끼고 불안을 자각한다. 그리고 스스로 불안의 뿌리를 찾는다. 충분히 느끼며 뿌리를 찾고 나면 다시 평온해진다. 모든 감정이 다 그렇지만 불안은 반드시 다시 오기 때문에 다시 오면 또 느낀다. 그럴 때는 불안하지 말아야지가 아니라 불안하구나라며 불안을 받아들인다. 이제는 안다. 감정이라는 것은 충분히 받아들이고 충분히 느낄 때만 해소된다는 것을.
공지영 씨의 어떤 소설에는 이런 말이 있다. 어둠은 빛으로 밝힐 수 있지만 안개는 걷히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그래서 안개가 더 두려운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