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들은 규정짓고 분류할 수 없다. 그러나 규정짓지 않는 것과 선택하지 않는 일은 다르다.
선택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선택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선택이 있다. 아아(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실 것인가 까페라떼를 마실 것인가를 선택하는 일은 눈에 보이는 선택이지만 <선택하지 않는 일>을 선택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선택이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선택만을 전부라고 생각하며 <선택하지 않기를 선택>한 부분은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마음의 깊숙한 곳에는 선택에 따른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숨어 있다. 선택의 결과에 대해 성공이나 실패라는 이분법으로만 규정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선택
선택의 성과
선택에 대한 결과가 성공이나 실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선택하고 그 결과를 경험하며 배울 수 있다. 배움은 성장을 일으키고 사고를 확장한다. 사고가 확장되는 것을 반복하면 유연해진다. 그것은 선택에 대한 유연성이다. 다양한 선택을 하다 보면 자기가 어떤 선택을 원하는지 알게 되며 선택으로 인한 결과에서 좌절을 경험하면서 또 다른 측면의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내면적인 선택이란 나를 힘들거나 부정적인 방식에 빠트리는 생각의 방식을 거부하고 나를 긍정적으로 성장시키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과거에 나는 친정엄마에 대한 깊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나를 몹시 괴롭게 했고 더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 감정과 생각들은 너무나 강렬한 것들이어서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다. 나는 죄책감을 선택할 것인가 행복감을 선택할 것인가. 나는 습관을 선택할 것인가 나만의 선택을 선택할 것인가, 나는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삶을 선택할 것인가, 나는 생존을 선택할 것인가 실존을 선택할 것인가. 매 순간 선택해야만 했다. 선택하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어떤 선택을 해도 결과는 오롯이 내 몫이기 때문이었다. 슬프고 외로웠고 억울했고 화가 났다. 그때도 선택해야 했다. 그 감정들을 붙잡아 둘 것인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릴 것인지. 매 순간 어떤 사람이 될지 선택해야만 했다. 고통스러운 환경이었고 과정이었다.
사회적 관습에 따르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습관이다. 습관과 선택하는 일도 다르다. 습관대로 하는 것 역시 <선택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다.
인간은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다지 많은 선택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택은 책임을 수반하기 때문이며 책임을 수용하는 일은 굉장히 번거롭기 때문이다. 그것을 감당하고 싶지 않아서 규정짓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외로운 선택.
선택권을 가지는 자는 언제나 주인이었다.
만약 내가 옷을 구입했는데 몸무게가 줄었다. 그래서 딱 맞던 옷이 커졌다면 나는 그 옷을 줄여 입거나 버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구입한 옷을 줄여 입거나 늘여 입지도 못하고 심지어 버릴 수조차 없다면 내가 그 옷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입지도 못하는 옷을 버리지도 못하고 모시고 살아야 한다면 내 옷은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입은 옷의 소유권은 내가 구입했으므로 기본적으로 내게 있다. 내 옷인데 옆집 아줌마에게 소유권이 있거나 내 옷인데 가족이 소유권을 가지는 일은 양도하지 않는 한 일어나지 않는다.
내 옷이 내 것이듯이 내 선택도 내 것이다. 오랜 역사에서 증명되어 왔듯이 선택권을 가져왔던 사람은 언제나 주인이었다.
<선택하지 않기를 선택>한다면 삶의 주인공이 아니라 주변인으로 살게 되며 자기 자신은 소외된다.
그럴 때 우울, 좌절, 공허, 허무, 열등감, 분노, 불안, 권태감,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선택하고 결과를 수용한다면, 설령 고통스러울지라도 삶의 주도권을 갖게 된다.
이 세계는 규정지을 수 없는 것들 투성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매 순간 선택해야만 한다. 규정짓거나 구분할 수 없다고 해서 선택권까지 없는 것은 아니니까.
<규정짓지 않음>이 유연성이나 고유성을 추구하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 그것은 <선택하기를 선택하지 않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내가 선택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떤 것도 감수하려 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