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엔 불행한 어른들 사이에 있게 되어 본의 아니게 불행했고 어른이 된 뒤에는 내가 보았던 불행한 어른들이 살아온 그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불행하게 느껴졌다. 내가 자라면서 보아 온 것은 그들의 공포와 불안과 공허와 불행감뿐이었다. 단 한 사람도 기뻐 보이지 않았고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본 행복과 기쁨은 티브이 속 드라마에나 존재하는 전설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더 드라마극본과정을 공부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공포와 불안만이 가득한 세계를 살면서 희로애락의 다채로운 삶이 있는 드라마 속 인생을 동경했을 테니까.
그들은 모를 것이다. 자신들이 어떤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자기 자신에 대해 얼마나 무책임한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들이 불행감에 젖어있는지도 모른 채 스스로 얼마나 많은 가능성들을 제한하고 불행을 고집하는지, 자기를 그렇게 만든 것은 세상이나 타인이나 야속한 세월이 아니라 본인이라는 걸 아마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갈비를 파는 식당에 가서 앉아 있으면 갈비 한 점을 먹지 않더라도 갈비 냄새가 밴다. 백화점 1층에 가서 시간을 보내면 물건을 하나도 사지 않더라도 거기서 파는 향수냄새가 옷에 밴다. 그런 것처럼 불행한 사람들 사이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면 그들의 불행감과 공허, 불안과 공포들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스미게 된다.
그들을 좌절시킨 것
몰랐다. 내가 부족하고 나빠서 불행하다고만 생각했지 그들의 정서가 나의 내면에 스며 내 삶의 방식을 결정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모든 일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어서 먹고 싶은 음식을 사 먹을 때도 망설이고, 갖고 싶은 물건을 살 때도 망설였다는 걸 몰랐고, 나를 발전시키는 공부를 선택할 때조차 죄책감을 이겨내야 했다는 것도 최근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내게 준 것은 깊은 외로움이었다. 그 외로움은 단 한 번도 온전히 받아들여져 본 적이 없는 인간들의 소외감이다. 그들은 그래서 불행했고 불안했고 화가 났다. 그들은 사오십여 년 동안 그렇게 좌절을 경험하면서 가장 약한 대상인 나에게 그런 감정들을 던지면서 해소하고자 했다. 그 과정을 통해 그들의 깊은 외로움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을까?
불행을 멈추게 하는 연결과 사랑
과거의 경험으로 내게 결여된 것이 무엇이며 경험하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 배웠다. 깊은 불행감에 매몰되어 있는 그들로 인해 나도 깊은 외로움을 경험했고, 그 외로움을 나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온전한 수용임을 깨달았다. 그들이 그렇게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작은 집에 모여든 이유는 연결되기 위해서이며 수용받기 위해서라는 걸 이제는 안다. 그렇지만 그들은 서로를 수용하지 않았다.
온전한 수용은 연결되어 있을 때가능해진다.
그 대상의 감정과 욕구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볼 때, 사랑도 생겨난다. 연결되려고 하지 않는다면
수용도 사랑도 일어날 수 없다. 또 연결되어 본 적이 없다면 연결될 수 있다는 것조차 알 수 없다. 인간은 외롭고 소외되어 있을 때 불안을 느끼고 불안 때문에 분노한다. 내면에서 좋은 자기와 나쁜 자기가 적절하게 융합되지 못하고 나쁜 자기가 과도하게 배척될 때가 건강하지 않은 상태라면 관계에서는 연결이 끊어진 상태가 인간을 아프게 하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연결은점점 끊어져가고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다.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칼을 들고 불을 지른다. 어떻게 하면 끊어져가는 연결을 다시 이을 수 있을까. 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모래 속에 작은 손을 넣고 두꺼비 집만 만들어 본 내가 할 고민은 아닐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생각해 본다. 그러자 마음 한 구석에서 너나 잘 살란 말이 들려온다. 나는 내가 잘 사는 일도 중요하지만 같이 잘 살면 더 좋지 않겠느냐고 대꾸한다. 투덜대던 목소리가 조용해졌다. 오늘따라 내 안의 투덜이가 귀엽다. 그 아이와 자꾸만 정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