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어 버빈스키
회사는 록하트에게 스위스의 외딴 요양원에 머물고 있는 대표를 데려오라고 지시합니다. 그는 마지못해 그곳에 도착하지만, 요양원은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치유라는 이름 아래 작동하는 이 시스템은 곧 그를 안에서부터 침식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더 큐어》 속 요양원은 겉보기엔 평온하고 정결한 치유의 장소입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마치 유리병 속 정물처럼 생기를 잃고, 기능적으로만 존재합니다. 이 공간은 인간의 상처를 어루만지기보단, 치료라는 명분 아래 사고를 제한하고, 행동을 규제하며, 시간을 마비시킵니다. 치유는 억압의 수단으로 변형되어 있습니다. 이 요양원은 결국 인간을 다시 ‘타인의 욕망에 순응 가능한 존재’로 재구성하는 정신적 감옥입니다.
욕망은 늘 정당한 명분으로 위장됩니다. 여기서 그 명분은 ‘치유’이며, 그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고통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만 받아들이도록 유도되죠. 요양원은 물리적인 장소이자, 정신적인 틀입니다. 결국, 이곳은 자기 자신을 잃는 곳입니다.
요양원을 감싸는 중심 매개는 **‘물’**입니다. 영화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욕조, 수치료실, 물탱크, 깊은 우물은 모두 치유의 장치로 기능합니다. 그러나 그 물은 대개 탁하고, 깊으며, 안이 보이지 않습니다. 물은 투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지만, 누구도 그것을 끝까지 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인물들은 물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치유의 일부라고 믿고, 스스로 그 속에 몸을 담급니다. 치유라는 언어에 속아 넘어가 순응하며 안정을 갈망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공포는 본격화됩니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치료가 아니라, 타인의 욕망에 의한 통제입니다. 물은 그 자체로 억압된 기억과 진실, 그리고 지배의 은유입니다. 표면은 고요하지만 그 아래에는 말해지지 않은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침잠해 있습니다. 《더 큐어》의 물은 흔히 말하는 ‘치유’의 이미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타인에게 맡기는 침묵의 감옥이며, 그 안에서 인물들은 차츰 자기 얼굴을 잃어갑니다.
록하트는 신자유주의적 인간상입니다. 성공을 위해 윤리는 거래할 수 있는 수단에 불과하고, 약자는 도태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는 요양원에서 뜻밖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는 어릴 적 아버지의 자살이라는 트라우마를 겪었지만,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억압된 기억입니다.
요양원이라는 통제된 세계 안에서 자신 또한 타인의 욕망과 시스템에 의해 억압당하는 경험을 하며, 그는 점차 자신의 과거와 감정을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그는 병들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상처를 숨기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억압의 공간 안에서, 역설적으로 그는 인간성과 기억을 회복하게 됩니다.
볼머는 욕망의 화신입니다. 그는 200년 전 불에 타 죽었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살아남아 지금껏 타인을 희생시키며 자기 욕망을 실현해온 존재죠. 그가 의사의 외피를 두르고 있다는 사실은, 그 욕망이 얼마나 정당화된 언어와 제도로 포장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불멸을 꿈꾸며 한나를 지배하고, 수많은 사람을 수치료라는 명분 아래 실험해왔습니다. 그에게 치유란 자기 욕망의 영속을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한나는 억압된 인물임과 동시에, 순수성과 재생의 상징입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볼머에게 길러졌고,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록하트를 통해 외부 세계의 가능성을 마주하고, 마침내 결정적인 저항의 주체가 됩니다. 그녀의 행위는 단순한 희생도, 구원도 아닙니다. 그것은 억압의 세계에 던져진 유일한 균열의 손짓입니다.
치료 같은 건 없다니까요!
당신들에겐 문제가 없어요! 일어나세요!
저자가 당신들을 병들게 하는 겁니다!!
《더 큐어》는 결국 선택의 문제를 다룹니다. 누군가는 치유라는 명분에 순응하고, 누군가는 그것에 질문을 던집니다. 록하트는 처음엔 외부인으로서 요양원을 탐색하지만, 점차 내부의 환자처럼 취급되고, 치료 대상이 되며, 감금당합니다. 그는 이 체계에 완전히 흡수될 위기에 놓이지만, 기억과 감정을 되찾는 과정을 통해 주체성을 회복합니다. 반면, 요양원의 환자들은 ‘치유’를 받아들이며 자발적 순응자가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고통을 ‘개인적 결함’이라 믿고, 시스템에 자신을 맡깁니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치유되고 있는가, 아니면 길들여지고 있는가?”
이 영화에서 욕망의 화신인 볼머는 자신의 얼굴을 숨긴 채 가짜 얼굴로 살아갑니다. 그는 타인을 조작하며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지만, 그 욕망조차도 오랫동안 왜곡된 유산입니다. 이 장치는 관객에게 불편한 자각을 안겨줍니다. “지금 내가 따르고 있는 욕망은 정말 내 것인가?”
욕망은 오래 살아남습니다. 억압은 종종 타인의 욕망을 대변하는 목소리로 내면에 침투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주체적 욕망을 회복할 것인가, 아니면 타인의 욕망을 살아갈 것인가라는 선택이 자리합니다. 주체적 욕망은 억압을 벗어나 스스로의 얼굴을 되찾는 일이며, 그것은 곧 내가 ‘나’로 살아가기 위한 첫걸음입니다. 주인공 록하트는 그 질문 앞에 섰고,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 질문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2017 년작인 이 영화는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로 잘 알려진 고어 버빈스키 감독의 작품입니다. 그는 <캐리비안의 해적>과는 아주 다른 분위기를 이 작품에서 보여줍니다. 감독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긴장과 공포에 남다른 집중력을 가진 듯합니다. 특히 대칭적이고 정교한 미장센을 통해 '완벽해서 더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시각화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밤에 보면 좋을 영화, 지금 넷플릭스에서 만나보세요.
https://youtu.be/zUxSDmDgB58?si=PyJbCde-MwkQrP6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