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폐허에서 피어난 주체성

가족이라는 끈적한 폭력

by 흔들리는 민들레


잃어야 얻는다.


오랫동안 나는 타인의 아픔을 내 몸의 통증처럼 느껴왔다. 엄마가 가여우면 내 마음이 미어졌고, 남편이 힘들면 내가 죄책감을 가졌다. 그들의 아픔은 곧 내 것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내가 이토록 무너져 내릴 때, 그들도 나와 같은 크기의 통증을 느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내가 우울의 바닥에서 숨을 몰아쉴 때,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일상을 살았고, 심지어 나를 비난했다. 내 아픔은 철저히 '나만의 것'이었다.



그 지독한 배신감과 상실감 끝에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 저들과 나는 다른 존재구나.'

신기하게도 우울증은 나를 파괴하는 동시에 나를 분리해 주었다. 내 안에서 타인의 감정과 나의 감정이 끈적하게 뒤섞여 무엇이 내 것인지조차 모호했던 날들이 우울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비로소 갈라졌다. 내 아픔을 공유하지 않는 그들을 보며, 나는 비로소 그들과 나 사이에 그어져 있던, 그러나 내가 보지 못했던 선명한 경계선을 목격했다.





내 아픔이 온전히 내 것이듯, 그들의 아픔과 인생 또한 온전히 그들의 몫이었다. 이 냉정한 분리를 받아들이자 비로소 숨이 쉬어졌다. 나를 질식시키던 끈적함의 정체는 '사랑'이 아니라 '경계의 실종'이었음을, 우울증이라는 고통스러운 렌즈를 통해서야 비로소 보게 된 것이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를 잃어야만 한다. 나는 '가족이라는 일체감'이라는 환상을 잃었지만, 대신 '나라는 독립된 존재'를 얻었다. 타인의 이해를 구걸하지 않고, 그들의 감정에 전염되지 않는 법을 배운 것이다. 이제 폐허 위에는 타인의 유령이 아닌, 오직 나만이 서 있다. 살점은 떨어져 나갔으나 그 자리에 새살이 돋았고, 알은 깨졌으나 그 덕분에 진짜 세상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비극의 끝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온전히 홀로 서는 '독립 선언'이었다.



결국 자립이란 타인과 연결되지 않는 고립이 아니라, ‘건강한 타자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3부에서 강조하겠지만, 우리가 마주한 시스템적 폭력은 대개 너와 나의 구분이 사라진 끈적한 유착 속에서 발생한다. 내가 그들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나는 타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할 수 있는 단단한 자아를 갖게 된다. 나의 폐허는 더 이상 비극의 현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타인의 목소리가 소거된 자리에서 비로소 나의 진실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 나만의 영토였다.


어빈 얄롬 - 미국의 정신과 의사


실존적 고립(Existential Isolation) - 어빈 얄롬(Irvin Yalom)

실존주의 심리치료의 거장 어빈 얄롬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혼자이며, 그 누구도 나의 죽음이나 고통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근본적 고립'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과 건강하게 연결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