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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디 Apr 29. 2020

Fashion unseen : 향으로 기억하는 룩

OOTD stroy #8

"무슨 향수 쓰세요?"


처음 만났거나 두세 번 만났거나, 아무튼 호감이 가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봅니다. 주의를 환기하고 둘과의 관계에서 진전이 될 만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습니다. 경우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때 애인 있어요?는 너무 본심이 바닥부터 드러나는 질문 같고, 집이 어느 방향이에요?는 방향이 다를 경우 다음 멘트가 '아 잠실? 저는 부천' 이런 식으로 곤란해질 수도 있고, 우산 있어요? 는 비가 와야만 쓸 수 있는 멘트입니다.


그때 '무슨 향수 쓰세요?'라는 말을 써보시길 바랍니다. 언제 들어도 설레는 말을 꼽아보라면 그중 하나가 향수를 묻는 질문이 아닐까요? 향수를 안 썼다 해도 상대의 체취가 좋았다는 칭찬인 만큼 형용하기 어려운 므흣한 분위기가 만들어질 테고, 향수를 썼다 하면 그 매력적인 향수가 당신과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향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들 만큼 원초적인 본능을 가장 강렬하게 자극하는 감각 요소입니다. 평범한 점심시간 코 끝을 스치는 숯불 향을 맡고 설레는 이유는, 선사시대 선조들께서 어렵게 사냥에 성공한 날고기를 불에 구워 드시던 오래된 감동과 직결되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DNA에 새겨진 불맛을 향한 욕망처럼, 특정 향은 우리로 하여금 끊어낼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어릴  에서 줄곧 써온 섬유유연제 향은 어른이 되어 맡아도 포근한 집과 엄마의 체취를 연상시키곤 합니다. 또는 퇴근  덜컹이는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가로지르고 있지만, 방금 뿌리고 나온 향수는 새벽녘 이슬 내린 들판에 누워 있는 기분을 자아내죠. 그래서 패션을 넓게 봤을  향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태생부터 몸에서  냄새,  냄새가 나는 사람은 없지만, 적절한 향을 사용하는 것은 시각화를 넘어서 자신을 각인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들어 향을 즐기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브랜드와 제품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딥티크와 조말론이 더 이상 니치하지 않은 니치 향수가 되었을 만큼 향수 소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자신이 좋아하는 향이 무엇인지, 잘 어울리는 향이 무엇인지 아는 경우는 그보다 적은 듯합니다.


만약 아직 인생 향수를 찾고 있다면 이 방법을 써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바로 '향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는 방법입니다. 살면서 스친 수많은 향 중에 나를 편안하게 했던, 또는 들뜨게 했던 향을 만난 경험이 반드시 있을 겁니다. '꿈꾸던 이상적인 향을 맡고 뒤돌아 봤다. 남자는 이미 군중 속에 섞여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 향은 아직도 코 끝에 남아 맴돌고 있었다.' 등과 같은 경험들 말이에요.⠀


저에게 가장 오래된 향에 대한 기억은 무려 5살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다니던 유치원 지하 1층에는 놀이방이 있었는데,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야 해서 평소에는 내려가볼 엄두를 못 냈었죠. 그 공간은 매번 사용하는 게 아니어서 지하 계단을 내려갈 때 차갑고 습한 공기에서 묻어나는 쿰쿰한 냄새가 났었습니다. 매주 수요일 오후가 되면 지하로 내려갈 수 있었는데, 그 날의 주인공인 친구가 짤주머니에 물건을 하나 숨기고 오면 친구들이 스무 고개를 하며 물건을 맞추는 놀이를 하러 내려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 어둡고 습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비밀스러운 짤주머니 게임이 어찌나 설레고 기다려지던지요. ⠀


그래서인지 지금의 제가 가장 좋아하는 향이 오크모스(oakmoss)입니다. 오크모스는 참나무에서 자라는 이끼에서 느껴지는 꿉꿉한 느낌과 숲 바닥의 쌉싸름한 냄새라고 표현되는 에센스입니다. 답을 맞추기 위해 스무 고개를 하던 긴장감과 마침내 짤주머니에서 물건이 나올 때의 짜릿함을 아직도 몸은 기억하는 듯합니다.

기성 향수 중에 자신의 향을 못 찾았다면, 에센스 하나하나를 맡아 보면서 조향해볼 수 있는 향수 만들기 체험을 추천드립니다. 가고 싶은 여행지를 상상하거나, 사진을 들고 가서 향을 대입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매일 아침 집을 나설 때 어떤 기분이면 좋겠는지, 어떤 느낌으로 퇴근을 하고 싶은지 상상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만의 향수가 완성될 테니까요.


전 이만 퇴근용 향수를 뿌리고 퇴근하러 가볼게요.

여기까지 오늘의룩 8번째 이야기 <보이지 않는 패션 : 향으로 기억하는 룩>이었습니다.


*Photo by Daniel Horvath on Unsplash [perfume]

*Photo by Darion Queen on Unsplash [m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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