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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진 Dec 06. 2018

엄마

엄마의 건강을 빌며

 

2011.05.30 00:36 들꽃


엄마,


이렇게 불러 놓고 한참을 멍하니 있습니다.


연세보다 젊고 늘 고운 모습일 것만 같았던 엄마셨는데 요즘은 뵐 때마다 늙으신 모습이 눈에 띄게 느껴져 무거운 마음 가득합니다.


요즘 전, 지금의 저보다 더 젊었던 시절, 부모님이 함께 찍으신 사진을 제 수첩에 넣어 다닙니다. 가끔 사람들에게 보이면 두 분의 한 모습에 한마디씩들 하지요. 저는 그 말 듣는 재미가 새롭고요.


지금 제 휴대폰 배경 사진은 엄마입니다.


독립기념관에서 폰으로 살짝 찍은 사진요. 뒷배경은 어수선하고 어둡지만, 이제부턴 정말 엄마를 염려하며 살아야하는 때에 접어들었기에 엄마의 사랑을 기억하며 살려고 배경에 담았습니다.


어릴 적에 두 분은 부모님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제게 큰 자신감을 주셨지요.


젊고 빠지지 않는 두 분의 외모에 깨어있는 사고, 배려심 등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는 것 중 최고였으니까요.


그런 부모님 덕분에 저는 종종 친구들을 몰고 왔죠.


집에서 무더기로 와서 자고 가는 것도 예사였지만, 늘 환한 얼굴로 꼬마손님들을 대접해 주셨지요. 그 당시 귀했던 녹음기로 노래를 녹음해주셔서, 지금도 그때 꼬맹이들의 목소리를 테이프로 들을 수 있죠.


당시 시골에선 거의 볼 수 없었던 넓은 화단은 또 어떻고요. 아버지께서 손수 씨앗을 뿌리고 가꾸신 꽃과 나무들이었죠.


2남 1녀 중 장녀인 저는 그런 부모님의 그늘 아래서 주위 분들의 사랑과 관심 듬뿍 받으며 성장했지요. 그러다 우리에게 큰 불행이 닥쳤던 건 아버지의 사고였죠.


그 전 몇 년 동안 아버지의 일들이 잘 안 풀려 무척 고생하셨는데 아버지까지 환자가 되고 보니 급기야 빚잔치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지요. 그 모든 것을 혼자 감내하셨던 엄마.


원래 사람 들이기 좋아하는 부모님이라 손님들은 물론, 훗날 손주들까지 다 모여도 복잡하지 않도록 직접 설계하여 지으신 그 큰 집과 넓은 마당, 멋진 정원수들을 하루아침에 넘기게 되셨으니 착잡한 심정은오죽하셨을까요.


농사일로 늘 고생은 하셨어도 일꾼들과 그 큰 집 살림을 이끄셨던 엄마가 부산의 햇볕도 들지 않는 뒷방 단칸에 살림을 옮기시고 친척집 가정부 생활, 식당일을 하셨던 엄마.


그래도 항상 밝은 모습이셨지요.


당시 아버지는 양산에 있는 신경정신과 병원에 계셨는데 차도 자주 다니지 않는데다 멀기도 먼 시골길을, 저는 피곤하다며 몇 번 가지도 못했는데 엄마는 ‘쉬고 싶지만 아버지가 기다리시니까 가야한다’며.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다녀오셨죠.


제가 결혼을 하게 될 때 아버지는 많이 우셨다지요. 다른 집 딸들 셋`넷 있는 거 부럽지 않다며 키우신 딸이었으니 많이 못해 보낸다는 생각에 마음 아프셨던 게지요. 그래도 결혼하고 아들 하나 더 얻었다며 좋아하셨는데......


그런데 엄마,


전 제가 잘 살아서 정말 잘 살아서 두 분께 효도하고 동생들한테도 든든한 누나이고 싶었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제 삶은 항상 고달프기만 했던지요.


시집가면 잘 살거라는 주위의 인사도 얼마나 들었던 저였던가요.


하지만 그 기대는 오히려 티가 되었던 걸까요.


어렵게 큰 딸 한결이를 낳았을 때 산후조리를 해주고 가시면서 안쓰러운 얼굴로 “ 이제 니도 엄마다.” 그러셨지요.


그 말씀은 제가 수없이 좌절을 겪을 때마다 주문처럼 떠올랐습니다.


그때부터 저도 엄마가 되어갔지요.


그래도 엄마, 전 아직 엄마만큼의 깊이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아니 엄마의 그 희생적인 사랑이 어디까지인지 감히 알지 못합니다.


못살아서 잘해드리지 못하면 성격이라도 좋아서 착한 딸이면 좋았을 것을 늘 상 엄마마음을 헤집고 상처를 드렸지요.


아버지께도 너무나 못된 딸이어서 부디 제가 효도할 수 있을 때까지 옆에 계시라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바랐지만 회한만 남긴 채 가셨지요.


아버지께의 후회가 너무나 커서 이제는 엄마를 더 간절히 붙들고 싶습니다.


그 연세에도 간병일 하시며 힘겹게 번 돈으로 못사는 딸자식, 손주 보험까지 챙기시고 먹거리, 생필품까지 바리 바리 싸서 택배로 보내시는 엄마.


“힘든데도 좋아하는 일 열심히 하며 씩씩하게 잘 사는 우리 딸 기특하고 사랑해”하고 말씀해 주시는 세련된 우리 엄마.


사람들이 제게 어려움 잘 견디고 사는 것 보면 대단하다고 말해줄 때 저는 자신한테 부끄럽지만 이렇게 말하곤 하죠.


“좋은 부모님아래서 잘 자라서 그래요. 어릴 때 해맑게 긍정적으로 자랄 수 있어서 그게 좋은 바탕이 된 것 같아요” 라고요.


엄마, 그래도 전 엄마처럼은 안돼요. 엄마처럼 온화하고 착한 목소리로 말하고 싶은데 때로 그냥 힘들어서 화가 나버려요.


그래서 제가 엄마 딸로 태어났나봐요.


엄마는 제게 가장 큰 숙제 같은 분입니다.


엄마와의 시간이 줄어들고 있음을 인지해야 하는 이제,


아직 허덕이고 살아야 하는 제 현실 앞에서 엄마를 생각하면 제 마음은 더 오그라듭니다.


그래도 우리 엄마는 당신의 하나 밖에 없는 딸이 기죽어 있는 모습은 절대 원하지 않으시지요.


당당하게 사는 딸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하시지요.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하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엄마 피 빼먹고 사는 못난 딸이 엄마께 아주 작은 마음밖에 드릴 수 없음이 그저 애통하고 죄송하기만 합니다.


늘 마음으론 아리고 아프면서도 겉으로는 투정만 더 많았던 딸이,


엄마가 오래 오래 건강하게 곁에 있어 주시길 소망하며 간절히 고백합니다.


“엄마, 엄마가 우리 엄마셔서 정말... 정말... 감사하고요. 엄마 딸이 울 엄마 많이많이 사랑합니다.”


2011  썼던 편지 

아직 부치지 했다.

아직  아픔 나지 까닭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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