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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e Mar 27. 2019

아버지와 답정너

스마트폰과 조우한 아버지를 보고 든 잡생각

불굴의 투지

마음 중에서도 하필 싸우고자 하는 마음인데, 심지어 그 각오가 몹시 굳세다. 꺾이지 않는 대쪽 같음이 묻어나는 어휘




투지로 써온 2G 폰


아버지의 직전 폰과 같은 모델

필자의 아버지는 생존자(?)를 찾기 힘들다는 011 번호 소지자였다(일주일 전까지). 이 말인즉슨 2G 서비스를 곧 5G가 도래할 시대까지 썼다는 것인데, 이 정도면 우공이산(山)처럼 관련된 고사성어를 만들어도 될 특급 근성이다.


문득 아버지가 2G를 고집한 혹은 숭고한(?) 이유가 몹시 궁금해졌는데, 여쭸더니 돌아온 대답은..


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시대의 마지막 '흥선대원군'이랄까나
"그냥. 내가 011 쓰겠다는데 자꾸 바꾸라고 보채는 게 꼴 보기 싫었어"


거창한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가만히 011 잘 쓰던 사람에게 어려워진 새 기기에 바뀐 번호를 들이미는 것 자체가 괘씸한 일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심지어 아버지의 형님인 백부님까지도..!) 손바닥 안의 세상을 쥐고 업그레이드에 혈안이 되어있는 동안, 아버지는 척화비를 쥐고 011을 묵묵히 지켜왔다. 


좀 더 옛날에 태어나 변방의 장수를 했다면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성을 만들지 않았을까..?


흔들린 우정과 회심의 질문


이 노래가 열린음악회 나갈 짬이라니..

위정척사파와 같던 아버지에게 뜻밖의 시험이 찾아왔다. 머지않아 2G 서비스가 종료된다는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 지금까지의 아버지를 유추해 보건대, 그대로 핸드폰을 안 썼으면 안 썼지 011을 버리고 스마트폰으로 갈아탈 위인은 절대 아니었다.


2G 서비스 종료에 따른 통신사의 대책

폰 없이 사는 자연인 아버지를 걱정하던 찰나, 통신사 놈들이 보내온 서신이라며 뭔가를 보여주시는 것이 아닌가..! 


요는 그간 2G를 쓴 투지에 감복해 기기도 지원해주고 요금도 할인해줄 테니 제발 스마트폰 세상으로 문호를 열어달라는 것이었다.


"아들, 지금 통신사를 옮길까 이 서비스를 일단 2년 써볼까?"


그리고 이어진 아버지의 질문은 내 귀를 의심케 했다. 흥선대원군이 개방을 얘기하다니..! 근래 받은 충격 중 가장 신선했던 충격. 


서신을 자세히 훑어보시며 항목마다 "이것은 무엇이냐"하고 물어보는 모습이 애초에 "이 서비스를 일단 2년 써볼까?"를 답으로 정하신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네. 그렇게 2년 동안 털어먹을 거 탈탈 털어먹고 이후에 새 폰과 함께 가족 결합으로 묶어요 그럼"


아버지의 심중을 이해한 나는 동도서기(西器)와 같은 멘트로 화답했다. 이 상황에 급진 개화파 같은 발언으로 아버지를 나무란다면, 신선했던 충격은 갑신정변처럼 그대로 3일 천하가 됐을 테니?


그렇게 아버지도 스마트 폰이라는 것을 쓰게 되었다. 이렇게 빠르고 부드럽게 넘어갈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진짜 좋아하시는 분은 따로 있었네


소자의 애교는 어머니를 닮은 것이옵니다

어머니께서 매우 좋아하셨다. 그래 그거면 됐다.


의외로 통신사 놈들의 협상 조건을 빠르게 수용한 아버지의 결단력에 감탄한 오늘의 뻘글리쉬도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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