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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최 May 11. 2022

하나님이 사라진 자리

#굉음의글쓰기 1차시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1990년대 말, 중학생이었던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컴컴한 길을 조급하게 걸으며 머릿속에 찬송가를 뇌었다. 폭삭 망한 가정이 내몰린 삼각지의 낡은 맨션. 해가 진 뒤 그 맨션에 도달하는 여정은 갓 난 중학생의 입장에선 아무 때나 뭐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매번 음침하고 무서웠다. 누구라도 붙잡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날 수호해요.” 그러나 그 길에서 내가 의지할 건 종종대는 두 다리와 머릿속을 맴도는 찬송가뿐이었다. 모든 찬송가가 향하는 곳, 내가 배반하고 버린 미지의 존재만이 그 순간 내 유일한 수호자였다.


나의 친할아버지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고, 그 덕에 어릴 적 우리 집의 공식 종교는 기독교(개신교)로 정해졌다. 할아버지는 충무로에 있는 영락교회에 다녔고, 우리 가족은 동네에 있는 충신교회에 다녔다. 난 충신교회 부설인 충신유치원을 나오고 초등학교 때부터 일요일마다 빠짐없이 초등부 예배에 나갔다. 촘촘히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주기도문을 외고, 찬송을 부르고, 전도사님의 설교를 듣고, 성가대 찬양을 들었다. 예배의 마지막은 전도사님의 축원이었다. 전도사님은 양팔을 독수리처럼 펼치고 축복의 말을 쏟았고, 우린 머리 위로 그 말들을 내려 받았다. 그러고 나면 삼삼오오 옹기종기 모여 젊은 선생님들과 성경말씀을 곱씹으며 공과공부를 했다.


난 성경공부를 꽤 잘했던 것 같다. 동부이촌동 충신교회 대표로 서노회 초등부 성경고사 대회에 나가 시험을 치고 은상을 타오기도 했다. 당시엔 서노회가 뭔지 몰랐는데 알아보니 노회라는 것은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입법 및 사법 기관이다. 도시 내 지역에 따라 동노회, 서노회, 남노회, 북노회 등으로 구분되는데, 충신교회는 서노회에 속해있었던 것 같다. 대회를 치르고 온 주말, 예배 시간에 많은 아이들 앞에서 이름을 불리고 상을 받을 때 무척 뿌듯했던 것 같다.


여름방학이 되면 교회에서 성경학교 수련회를 떠났다. 산속에 지어진 기도원에 초등부 친구들과 2박 3일 동안 머물며 낮에는 물놀이를 하고 밤에는 강당에서 기도회를 벌였다. 돌아보면 어른들의 부흥회 비슷한 것으로, 중언부언 기도의 말을 쏟아내는 의식이었다. 다음 날 우리는 오묘했던 어젯밤을 회상하며 믿음이 깊어지면 알 수 없는 방언이 나온다느니 하는 신비로운 잡담을 나누었다.


4학년 무렵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해보고 싶단 생각에 성가대에 자원했다. 매주 합창 연습을 하고, 일요일 예배 시간이 되면 성스러운 가운을 입고 성가대석에 자리했다. 그리고 성가대의 차례가 되면 일어서 사람들의 시선 집중을 즐기며 노래하고 악보 책장을 넘겼다.     


그러니까 요는, 난 교회에 꽤 열심인 아이였다는 말이다.

그랬던 아이가 어쩌다 하나님을 버리고 밤길을 오들오들 떨며 걷게 되었던가.     



난 하나님도 좋아했지만 서태지도 좋아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활동했던 초등학생 때 서태지를 첫사랑 열병처럼 좋아했다. 팬이란 곧 빠순이로 통하던 야만의 시기, 아마 난 빠순이의 어설픈 초딩 버전이었을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소속된 위프로덕션에 뻔질나게 드나들며 사진, 책받침, 포스터 따위를 사 모았고, 서태지가 연희동에 산다는 말을 주워듣고는 주소도 뭣도 모른 채 연희동 길거리를 밤 9시까지 배회하고 다녔다. 결국 서태지의 집을 찾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를 찾아 헤맨 기억은 뿌듯한 추억으로 남았다. 그날 집에 와서 엎드려뻗쳐를 하고 엄마에게 빠따를 맞았다고 하는데 그 일은 기억에도 없다.


난 특히 <교실이데아>가 수록된 3집부터 서태지와 아이들에 소용돌이처럼 빠져들었다. 10년여의 삶에서 가장 진지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2집까지 서태지는 나의 베스트였다. 그리고 3집을 듣자 서태지는 나의 온리원이 되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은 내 사춘기를 당겨왔다. 고3이 되어서야 막을 내린 내 기나긴 사춘기의 문을 그 앨범이 열어젖힌 셈이다.


<교실이데아>는 대중가요의 악마주의 논란을 불러일으킨 곡이다. 테이프를 뒤집어서 안흥찬이 부른 ‘왜 바꾸지 않고~’ 후렴구를 재생시키면 ‘피가 모자라, 피고파’ 하는 악마의 메시지가 숨어있다는 이야기였다. 지금 생각하면 웃프기 짝이 없는 해프닝이지만, 당시엔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다룰 정도로 우리 사회는 참으로 진지했다.


교회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설교를 담당하는 목사나 전도사들은 서태지를 비롯한 대중가요가 사람들을 악으로 끌어들인다고 열변했다. 교회는 벼르고 있었던 듯 대중음악을 악의 축으로 메다꽂았다. 내 음악취향 저변을 구성하는 록음악은 그중 메인 타깃이었다. 설교마다 특정 가수와 그룹의 이름이 불려나왔고 서태지는 개근상감이었다.


나는 아슬아슬 줄타기를 했다. 빠순이 모드로 서태지도 계속 좋아하고, 크리스천 모드로 성경공부도 계속했다. 그러다 아주 작은 의심의 씨앗이 발아했다. 어느 지점이었을까. 선악과였을까. 소돔과 고모라였을까. 대홍수였을까. 어디서 날아온 씨앗이 싹을 틔웠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줄기를 내고 가지를 뻗던 어느 날이 있었다. 아마 5학년 때였을 것이다. 나는 할까 말까 고민하다 용기 내 공과공부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 하나님은 언제부터 계셨어요?” 공과공부 선생님은 당황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그건 네가 더 크고 어른이 되면 알게 돼.”

난 더 질문할 용기는 없었다. 대신 집에 돌아와 다음 주부터 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난 내 선언을 딱 두 번 어겼다. 그중 한 번은 6학년 때다. 교회를 끊은 내 마음을 돌리려고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가 다니는 영락교회 성인 예배에 데려갔다. 근데 참 운도 없지. 그날 목사는 설교 때 마이클 잭슨까지 악마로 몰아붙이며 대중음악을 열렬히 비난했다. 그날의 교회는 내가 왜 하나님을 믿지 않기로 했는지 가족들에게 증명하는 자리밖에 되지 않았다. 이후 가족은 내게 더 이상 교회에 가자고 하지 않았다. 다른 한 번은 고등학교 때였다. 6학년 때 서태지는 은퇴해버렸고, 하나님의 빈자리는 대체가 되지 않았다. 서태지는 곧 솔로로 복귀했지만 내가 버린 신앙은 이제 그와 별개의 문제가 되어있었다. 무엇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할까. 교회에 다닐 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내 존재 이유가 충만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초딩 때의 나처럼 열성으로 교회에 다니는 친구를 따라 온누리교회에 가보았다. 그 교회의 무엇이 그 친구를 그렇게 채워줄까. 그 교회라면 나도 그렇게 채워질까.


답은 ‘아니요’였다. 청년부의 예배는 그룹사운드 같은 대중적인 요소를 도입해 흥겨움이 가득했지만, 난 여전히 그 친구가 두 눈을 감고 두 팔을 치켜들며 경배하는 ‘그’의 존재가 믿기지 않았다. 저들처럼 ‘그’가 사무치게 믿겨져서 저 속에 섞여들고 녹아들고 같이 소용돌이치고 싶었지만 끝내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의심의 나무가 드리운 그늘만 무성해지고, 머릿속엔 이방인의 질문만 맴맴 돌았다. ‘이봐, 너희. 대체 어떻게 그렇게 믿어버릴 수가 있는 거야?’     



머리가 커지며 내가 ‘하나님’이라 부르던 존재는 ‘신’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난의 행군 같은 사춘기를 겪은 뒤 고3 한 시기 빡세게 공부해서 간신히 철학과에 진학했다. 그땐 윤리 과목을 좋아해서 택한 전공인데, 누가 물으면 ‘신을 찾기 위해서’라는, 그럴 듯하면서도 추가 질문을 차단하는 이유를 갖다 붙이곤 했다. 그런데 지금 와선 그것도 나름 진실인 게,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뜻밖에도 신을 찾았기 때문이다. 아니, 신을 찾았다기보다는 신에 관한 내 숙제를 풀었다. 헤겔과 니체가 오래전 내어준 답안지가 그곳에 있었다.


고대부터 첩첩이 쌓여온 배반과 전복의 철학사가 내 개인사와 맞물려 들어갔다. 내 유년기는 고대 플라톤 시기 같았고 내 청소년기는 중세 암흑기 같았다. 갓 성인이 되었을 때 나는 근대 계몽의 시기를 보냈고, 답을 찾을 무렵의 난 니체의 망치를 쥐고 있었다. 신은 없었다. 그는 애초부터 없었고, 지금의 우리는 그를 상정할 필요조차 없었다.


미지의 세계가 두렵고 불안했던 인간. 그래서 신이 필요했던 옛 인류. 신은 인류의 유년기 적 무지의 산물이자 발명품이다. 비가 안 온다고? 그것은 신이 노했기 때문이야. 그러므로 신의 의지에 반하지 않도록 성실하게 살며 그를 추앙해. 그럼 신이 화를 풀고 인간에게 비를 내릴 거야. 신앙은 무지했던 인류가 잡고 올라갈 수밖에 없는 불가결한 동아줄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가 성숙한 인류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과거의 우리보단 성장하고 성숙한 태도를 지녀야 함이 마땅하다. 이만큼 누적된 역사와 지식을 가지고, 이때까지 흘러온 의심과 외로움과 번민들을 쌓아놓고 고작 애초의 신으로 되돌아간다면 그것만큼 허무한 결론이 있을까. 우리가, 내가 이루어놓은 것들은 모두 유의미한 과정이었고 가치 있는 성과였다. 그 경험치를 두고 고양되지 않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의미 박탈이다.

그래, 신은 죽었다. 신이 보장해주던 인간 존재의 의미는 애초부터 없었다. 우린 모두 우연의 산물이다. 황량한 설원에서 눈을 뜬 의식들이다. 그래서 허무한가? 아니. 그래서 우린 비로소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만들 수 있게 되었는걸. 니체가 준 답에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우린 날 때부터 주어진 의미나 소명 따위가 없기에 스스로 원하는 대로 자신을 빚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기쁜 운명이다. 나는 신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기에 끊임없이 나를 초월해 나아갈 수 있다. 아모르파티여. 위버멘쉬여.


신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있든 없든 나랑은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게 내 답이었다.

그렇게 나는 무신론자가 되었다. 나의 서사에서 신은 더 이상 요청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사라진 자리. 그 자리에 실존하는 존재의 빛이 차오른다. 하나님, 고마웠어요. 이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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