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응의 글쓰기 20기 6차시 과제
난 문장을 좋아했고, 읽는 것보단 쓰는 걸 좋아했다. 작가를 꿈꾸며 자랐고 다른 길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글을 쓰고 있든 안 쓰고 있든 내 자의식은 글쟁이였다. 지금 이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단 한 문장도 더 쓰지 않는다 해도 나의 정체성을 글쟁이라 여겼다.
글과 문장을 다루는 일을 하기 위해 선택한 진로는 출판사였다. 첫 직장에서 난 편집부가 아닌 기획실 소속이었다. 보통은 편집부에서 기획과 편집을 같이 하는데 그곳은 기획실을 따로 두어 각 100권씩 되는 과학, 수학, 철학 과목의 아동 학습교양 시리즈를 진행했다. 한 번에 수십 권의 원고가 돌아가는 체제였기에 기획실에 전공 인력을 두어 다량의 원고 수발과 최종고 완성을 맡게 하고, 편집부에서 각 권 최종고를 넘겨받아 삽화를 넣고 교정교열해서 마감하는 체제였다.
나는 철학 시리즈 기획실 담당자로 일했다. 시리즈가 절반 정도 출간된 시점에 입사해 동료 한 명과 둘이서 나머지 50여 권 분량을 나눠 진행했다. 우린 대학교수 저자의 초고를 받아 윤문작가에게 동화 각색을 의뢰했다. 윤문작가는 주로 문예창작을 전공한 이들이었다. 우린 각색 과정에서 철학 이론 내용이 잘못되지 않았는지, 동화의 소재나 스토리 흐름이 적절한지, 초등 대상에 적합한 난이도와 재미를 갖추고 있는지 검토했다.
대학교수가 보내온 초고는 실상 참고자료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조교가 대충 쓴 논문 같은 원고도 있었고, 나름 최선을 다해 동화식으로 써주신 감개무량한 원고도 있었으나 대개 아동이 읽는 생활동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시리즈 원고의 핵심 역량은 윤문작가에게 있었다. 그가 얼마나 지식 내용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스토리로 잘 풀어내는지가 중요했다. 나는 윤문작가에게 저자 초고만 덜렁 보내기 미안해 목차별로 들어갈 지식 내용을 요약해 구성안을 만들어 보내곤 했다. 윤문작가가 도저히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거나 교수님 원고가 너무 어려워서 이해가 안 된다고 토로할 땐 만나서 함께 머리를 맞대고 스토리를 짜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원고가 입고되면 PC로 마지막 내부수정을 보았다. 바야흐로 찾아온 평온의 시간. 난 그 시간이 가장 좋았다. 타닥타닥 문장을 바로잡다 보면 목 뒤에 찌르르한 느낌이 흘러내리고 시간은 정처 없이 흘러갔다. 다 되었다 싶으면 이면지에 원고를 출력해 사장실 책상에 올려두었다. 대청소할 때면 빈 사장실에 들어가 내가 올린 원고의 상태를 확인했다. 접혀진 페이지나 메모가 있으면 자리에 돌아와 그 부분을 다시 살펴보며 마음을 졸였다.
몇 번은 다시 정리하라고 되돌아온 원고가 있었다. 그럴 때면 윤문작가에게 재작업을 의뢰하기가 난감했다. 윤문작가의 이름은 책 어디에도 실리지 않았다. 인세를 받는 교수 저자들과 달리 이들은 200만 원가량의 매절 금액을 받고 원고지 300~400매 분량의 철학 내용이 담긴 동화 한 편을 창작하는 용역을 제공했다. 계약상 그들에겐 출판사가 만족할 때까지 수정할 의무가 있었지만, 기울어진 대우를 아는 담당자로선 미안함을 안고 읍소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일은 우리가 다 하고...’ 이런 볼멘소리를 들으면 ‘에휴, 그러게 말이에요...’밖에는 응대할 말이 없었다. 그들에게 미안해해줄 사람은 담당자뿐이었기에 최선을 다해 미안해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지 몰라도 뒷권으로 갈수록 최종고는 큰 이슈 없이 OK가 되어 내려왔다. 회사로선 빨리 시리즈 100권을 완간해 홈쇼핑 판매를 해야 했다.
둘이서 연내 50권의 원고를 넘겨야 했던 지옥의 일정. 작업자들을 갈아 만든 시리즈. 아마도 마감 최전선에 있던 편집부가 기획실보다 더한 전쟁을 치렀을 것이다. 허나 진행 와중에는 서로 날이 서있었다. 편집부는 기획실에서 최종고가 늦게 넘어와 출간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고 했고, 기획실은 원고 수정이 더 걸린다거나 사장님 컨펌이 늦어져서라고 대응했다. 사실 기획실은 탓할 곳이 없었다. 교수님을 탓할 수도, 억울한 윤문작가를 탓할 수도, 사장님을 탓할 수도 없었으니 그저 옥신각신. 덧붙여 편집부는 삽화 구성을 최종고에 포함해서 달라고 요구했다. 기획실은 원고 다발 진행에 부록까지 직접 작성하는데 삽화 구성까지 우리가 하게 되면 최종고 내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고 투덜댔다. 빨리 넘기라면서요. 그것까지 하면서 어떻게 더 빨리 넘겨요. 삽화 구성은 편집부에서 할 수 있는 일 아니에요? 그러나 기획실장보다 편집주간의 입김이 더 셌고, 삽화 구성도 기획실에서 해서 넘기기로 결정됐다.
토 나오는 일정 속에서도 데이터로 보던 작업물이 물성을 띤 결과물로 돌아온 것을 보면 신기했다. 내가 모니터를 보며 수정했던 가상의 텍스트들은 하나둘씩 종이에 잉크로 인쇄되고 묶여서 손으로 만져지고 냄새도 나는 책 실물이 되어 돌아왔다.
완간이 머지않은 시점, 나는 윤문작가의 이름을 판권에 넣자고 제안했다. 상사는 건의해보겠다고 했고 며칠 후 사장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전해주었다. 교수 외에 다른 이름이 저자로 붙는다면 책의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그로써 어딘가에 보관돼있을 용역계약서와 나를 포함한 담당자들의 기억만이 윤문작가들의 노고를 증명할 기록이 되었다.
입사한 지 1년 만에 시리즈는 마지막 100권 출간을 완료했다. 완간 후 난 전국 도서관투어 저자강연 이벤트를 하느라 몇 달 간 출장을 다니며 그간 직접 뵙지 못한 지방의 저자들과 강연장에 모여든 어린이 독자들을 만났다. 그 경험은 즐거웠던 추억으로 남았으나 그곳에도 윤문작가들의 자리는 없었다.
아동 지식서를 개발할 때 고질적인 딜레마가 있다. 학부모가 신뢰할 만한 지식의 권위자는 대부분 아동의 눈높이에 맞게 글을 쉽게 쓰지 못한다. 아동 대상에 맞는 글을 잘 쓰는 전문작가는 지식의 전문성이 없어 오류 위험이 크다. 그래서 박사나 교수 급의 권위자와 전문작가를 공동저자로 하거나, 전문작가가 글을 쓰고 권위자가 감수를 한다. 국내 아동 지식서의 저자 선정은 이 두 가지 범주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권위와 신뢰성이 있으면서 아동서 원고도 잘 쓰는 저자는 너무도 귀해서 보통의 아동 교양서나 시리즈물을 개발할 때 선택지에 넣을 엄두를 못 낸다. 내가 참여했던 철학 시리즈는 첫 번째 방법에서 전문작가를 지우는 선택을 했던 것이다.
책은 권위의 매체였고 지금도 그럴 것이다. 정당한 권위는 유효하고 인정받아야 한다. 다만 어떤 권위를 그 자리에 위치하도록 조력하는 무명의 노동이 존재하기도 한다.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 지금은 그때보다 얼마나 투명해졌을까. 여전히 출판업계엔 보이지 않는 무명인들이 존재할 것이고, 협업의 결과물은 항목화가 애매해 어딘가에서 지워지는 이름들이 있다. 그렇다고 펄프를 제공한 나무의 이름까지 표기할 순 없는 일. 그저 좀 더 정직하고 담담하게 책에 실어야 할 이름들을 대하는 태도가 필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