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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최 Apr 01. 2022

42와 72 사이의 안전지대

#감응의글쓰기 20기 7차시 과제

내 가장 오래된 기억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대여섯 살 때쯤일 것이다. 동네 친한 엄마들과 아이들이 다 같이 잠실 롯데월드에 놀러 간 날이었다. 퍼레이드 시간이 되자 마스코트인 로티와 로리 인형이 행렬 앞에서 손을 흔들며 걸어갔다. 아이들은 달려가 인형에게 안기고 사진을 찍었다. 엄마는 잡은 손을 흔들며 “너도 가봐.” 했지만 난 꼼짝 않고 엄마 손을 붙든 채 생각했다. 내가 가까이 가면 저 인형이 날 싫어할 거야. 나는 못생겼으니까.


내 생애 첫 기억이 왜 저 모양인가 특별히 궁금했던 적은 없다. 다만 오랜 시간이 지나 나와 같은 항렬의 외사촌들이 결혼해 아기를 낳아 키우기 시작할 무렵 어렴풋이 짐작했다. 어쩌면 범인은 이모들인지도 모르겠다고.


엄마는 7남매 중 여섯째다. 외가 식구가 다 모이면 그 자식들까지 서른 명은 족히 넘는다. 최근 십수 년은 그 자식들의 자식인 4세대 탄생의 시기였다. 결혼과 환갑, 돌잔치, 고희연 따위가 연례행사처럼 이어졌다. 모일 때마다 하나둘씩 새 식구가 생겼고 어느새 모임은 아이들 판이 되었다. 뛰어다니는 조카손주들을 보며 이모들은 누구는 예쁘니 누구는 밉니, 누구는 뚱뚱하니 누구는 말랐니, 누가 하얗니 까맣니, 누가 누굴 닮아서 어떻니 하는 입방아를 찧었다. 부주의하게 던져지는 어른들의 말을 아이들은 안 듣는 척하며 다 듣고 있었다.


나는 3.8킬로그램의 우량아로 태어나 엄마 젖을 엄청 먹었다고 한다. 갓난아기 때 사진을 보면 포동포동하다 못해 피둥피둥하다. 쌍꺼풀이 없고 쪽 찢어진 내 눈은 큰 눈망울을 가진 또래 유아들에 비해 예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이모들은 날 뚱뚱하고 미운 아이로 평가했을 것이고, 애인이나 결혼에 관해 질문당하는 지금의 나 못지않게 30여 년 전의 어린 나도 이런저런 부주의한 말들을 들었을 것이다. 덕분에 난 외모에 관한 내 계급을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부터 하층으로 상정해둘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안다는 듯이 말이다.


난 뚱뚱한 여학생이었다. 초등학교 땐 또래를 웃도는 키에 낙낙한 체형이었으나 중학교 때부터는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체중만 늘기 시작했다. 끝이 보이지 않던 허기의 시기. 나는 어느 정도나 배가 가득 차야 포만하다 말할 수 있는지 몰랐다. 방과 후엔 친구들과 분식집으로 향했고, 학원이 끝나면 다시 분식집에 들렀다 귀가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도 자기 전 컴퓨터 앞에 앉아 밤식빵 한 통을 해치웠다. 성장기라고 무엇이든 먹게 놔두었던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느라 음식을 해 주는 일이 드물었다. 대신 집에는 알아서 해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음식이 가득했다. 마트에서 일하는 엄마가 야간 근무를 할 땐 내가 가족의 저녁상을 차려야 했다. 난 빈번하게 냉장고와 찬장을 열고 그 속에서 무언가 꺼내 먹었다. 먹는 습관. 그 덕에 학창시절 난 늘 비만이었고 최고 몸무게 72킬로그램을 찍기도 했다. ‘뚱뚱함’이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장착한 태그 같았고, ‘예쁜 애들’이란 언제나 당연히 나와 상관없는 목록이었다.


스물셋 무렵 난 자의식에서 ‘뚱뚱함’과 ‘못생김’을 걷어냈다.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일차로 살이 빠졌고, 전 남친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2차 가해에 시달려 음독자살을 기도했다가 위세척을 한 뒤로 ‘먹는 습관’이 슬그머니 실종됐다. 처음엔 섭취량과 몸무게가 저절로 줄어들었다. 나는 몸의 변화를 알아채고 의식적으로 가세하다, 기어이 칼로리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의 칼로리를 파악했고 하루 섭취량을 500~600칼로리로 통제했다. 식사는 하루에 한 번, 절반 이상 남기는 것이 원칙이었다. 치킨은 날개 한 조각만. 달걀은 흰자만. 오뎅바에선 오로지 곤약 꼬치만. 200칼로리밖에 먹지 않은 날은 뿌듯했고, 어쩌다 1000칼로리를 먹은 날은 자책하며 다음 날의 칼로리를 옥죄었다.


나머지 허기는 녹차나 술을 마셔서 채웠다. 낮에는 하루 종일 녹차 병을 손에서 놓지 않고 3리터 이상 수분을 섭취하며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밤에는 안주 없이 술만 마셨다. 술 칼로리는 다 빠져나가. 술살은 안주 때문에 찌는 거야. 소주 한 잔에 맥주 한 모금으로 쓴맛을 헹구다 보니 매일 형편없이 취했고 아무에게나 들쳐 업혔다. 그럼 다음 날 ‘너 너무 가볍더라.’ 소리를 들으면 미안한 표정 뒤로 흡족함을 감추었다. 이따금은 택시 요금을 바가지 쓴다든지 모텔에서 뛰쳐나온다든지 하는 사고도 겪었다.


어쨌거나 난 42킬로그램에서 멈췄다. 그 이상은 살이 빠지지 않았다. 너무 말랐으니 살 좀 찌우라는 소릴 듣는 지점. 학창시절 친구들이 다이어트 비결을 물으면 난 여유로운 듯 대답했다. “그때야 한창 때라 그랬지, 지금 어떻게 그렇게 먹어?” 하지만 언제라도 냉장고 문을 열던 버릇이 살아날까 불안했다. 매일같이 체중계에 올라 100그램 단위로 무게를 재며 42에서 42.5로 증가하는 수치를 두려워했다. 42든 43이든 나는 언제나 72킬로그램과 42킬로그램 사이의 육체였고 72로 다가가는 바늘을 저지하는 최전선에 있었다. 가느다란 팔다리와 널빤지처럼 납작한 배. 화병같이 잘록한 허리와 우둘투둘 드러난 갈비뼈. 누구도 이 몸을 보며 72킬로그램의 육체를 떠올리진 않으리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리고 난 혼자서 매일 어딘가를 돌아다녔다. 영화를 보거나 사진을 찍거나 서점에 가거나 전시를 보거나, 어디라도 나가서 무언가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또 나는 군휴가 때나 가끔 만날 수 있는 한 남자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에게 밤마다 편지를 써 보냈다. 그가 곁에 있었다면 난 모든 걸 내주고 빈털터리가 되었을 테니 그가 곁에 없어 나는 안전했다. 안전한 거리에서 밤새 배설한 편지들을 그의 주소지로 내다버릴 수 있었다.


나는 생각해왔다. 20대의 한가운데를 지나던 그때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정신적으로 충만했기에 상대적으로 육체적 허기를 가볍게 다룰 수 있었다고. 나 자신과 내 삶이 충분히 아름답다 느껴서 몸의 배고픔이 충족되지 않아도 괜찮았다고. 필요는 욕구로, 소망은 욕망으로 소급된다면 내 욕구와 욕망은 반비례 관계인지도 모른다고. 난 마음이 채워지면 육체는 비어도 괜찮은 사람이고, 72킬로그램까지 육체를 채우던 학창시절의 난 그토록 마음이 비어있던 것이라고.


그리고 20대로부터 한 뼘 더 멀리 온 내가 다시 생각한다. 칼로리와 체중에 매진하며 마른 몸을 사수하던 강박이 내게서 눈을 돌리려던 것은 무엇이었나. 나는 왜 ‘그들의’ 미의 기준에 맞게 내 몸을 재단하는 데 그토록 집착했던가. 그건 나를 개로 만들었던 그자의 얼굴을 물어뜯는 실현 불가능한 상상보다, 내 몸을 갈가리 분해하며 칼로리와 그램 단위의 숫자들을 노려보는 것이 더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난 ‘그들에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으로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내가 남성의 욕구의 대상이 된다는 전제 위에 성폭행 피해자라는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을 테니까. 너처럼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를 누가 범하겠냐는 비웃음마저는 당하지 않기 위해, 누구에게라도 내 비극을 말할 때 나 자체가 아무런 부연이나 의심 없이 단번에 상대방이 납득할 증거로 존재하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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