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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최 Mar 26. 2022

왕왕 으르르렁 컹컹!

#감응의 글쓰기 20기 3차시 과제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휴대폰을 보며 나도 생각했다. 그만 좀 짖어라.


오랜 세월 너무 많이 되새김질한 탓에 이제는 진부한 전래동화처럼 느껴지는 이야기이다. 스물둘에 만난 그는 내 인생에 역대급 물의를 일으키고 한동안 내 인생의 개새끼 종목 금메달리스트로 활약하다 현재 뒷방 명예의 전당에 안치되어 있다.


대학에서 술에게 잡아먹히기 직전, 나는 타임을 외치듯 휴학했다. 영어학원도 나가리, 편의점 알바도 나가리. 그러다 종로 고깃집에서 알바를 시작했고, 맞은편 주막집 알바생과 눈이 맞아 첫 연애 후 두어 달 만에 헤어졌다. 때는 여름 휴가철. 그는 친구들과 약속한 휴가 여행에 여친을 데려오겠다고 떠벌려놓았는데 이제 와 헤어졌다 말하기 창피하다며 그 여행까지만 같이 가달라고 부탁했다. 난 그가 장미꽃 한 송이 내밀며 부탁하는 손이 바들바들 떨리던 데 연민을 느껴 수락했고, 여행 가서 먹고 마시며 얼마 되지도 않은 연애할 적 지지고 볶던 일을 다 지난 일처럼 얘기하다 보니 또 이것이 쿨한 이별인 듯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술이 쭉쭉 들어가다 보니 둘째 날을 보내고 눈을 떴을 때에는 시퍼런 새벽이었다. 나는 차 뒷좌석에 누워있었고 그는 내 위에 엎어져 있었다. 소스라치며 밀어내자 그는 앞좌석으로 떠밀려가 바지를 올렸다. 옷을 주워 입으며 필름 끊긴 어젯밤에도 이랬냐고 묻자 그는 그렇다고 했다.


같이 온 일행은 모두 그의 친구들이었고 난 혼자 달아날 방도를 몰랐다. 날이 밝으면 집에 간다는 것이 신의 가호였다. 흠흠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난 꾸역꾸역 짐 정리를 하고 꾸역꾸역 그 차에 끼어 타 서울에 도착해서야 간신히 탈출했다.


그 뒤로 야만의 날이 시작되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내게 연락했고 난 분노에 찬 문자로 응수했다. 그중 ‘너는 강간범이야’란 문구가 그의 뇌관을 건드렸던 것 같다. 그는 날 찾아와  “너네 부모님한테 전화해서 얘기할까? 너랑 나랑 잤다고 니 부모님한테 얘기할까?” 하고 윽박질렀다. 당시엔 멍할 뿐이었지만 훗날 나는 그 사고구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어서 그는 내게 여행 회비 16만원을 요구했다.


개 짖는 소리 좀 하지 마라.


내 반응이 이렇자 그는 내가 알바 끝나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날 기다리기 시작했다. 퇴근하는 날 보고 쫓아오며 돈을 달라고 읊조렸다. 난 그를 모른 척하며 종종걸음쳐 달아났고, 간혹 동료 알바생에게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그가 우리 집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집에서 나올 때도 주위를 두리번거리곤 했다.


내가 버티자 그는 우리 가게 알바생들에게 내가 빌린 돈을 안 갚는다며 도와달라고 독촉 문자를 돌렸다. 그것 때문에 대학 등록금을 못 내고 있다, 집안 빚을 못 갚고 있다, 공과금을 못 내고 있다 등 여러 버전의 사연이 뿌려졌다. 다들 어느 게 진짜인지 혼란스러워하는 한편으로 ‘16만 원 때문에?’ 하고 의아해했다. 싸움이 고깃집 대 주막집 양상으로 흘러가자 모두가 고통에 신음했다. 제발 누가 이것 좀 끝내줘.

버스정류장에 데려다주던 동료가 말했다. 더러운데 주고 떼버려.

주방 이모가 소주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니 입장은 알겠는데 줘야 끝나지.

개 짖는 소리 좀 안... 외치려는데 모두들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 내가 개였구나.


힘 빠진 손에 너도나도 백기를 쥐어주었다. 그 손으로 약국을 돌며 수면제를 사 모은 뒤 16만 원을 들고 주막집으로 갔다. 날 앞에 앉히고 그는 연설을 시작했다. 내가 이러저러한 사정이 있어 너에게 이러저러했지만 사실 나도 그래놓고 마음이 이러저러해 엄마에게 지금 이러저러하다 얘기를 하니 엄마가 너 갖다 주라고 미역국을 끓여주더라 죄 없는 우리 엄마 성의를 봐서 먹어주라. 난 두말없이 보온병을 받아들고 돈 봉투를 건넸다. 그는 흡족해하며 그래도 여전히 자기 마음이 이러저러하니 차라리 여기서 엎드려뻗쳐를 할게 날 두들겨 패라는 둥의 소리를 한참 했다. 나는 다 듣고 나왔다.


그날 밤 나는 수면제 44알을 입에 털어놓고 잤다가 골로 갈 뻔했으나 새벽에 또 눈이 떠지는 바람에 목숨을 건졌다. 약기운에 헛것이 보이는 게 무서워 친한 동료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가 우리 집으로 구급차를 불러주었다. 가족이 깰까 봐 몰래 집을 나가 아파트 현관에 쪼그려 앉아있다 실려 갔다.


입에 호스를 물고 “지랄발광을 했네.” 따위의 농담을 눈 뜨고 들으며 위세척을 하고 나니 아침이 되었다. 병원 연락을 받고 날아온 엄마, 아빠는 겔겔대는 날 보고 한숨지었다. 링거를 맞을 때 정신과 레지던트가 와서 자살기도 환자는 규정상 심리 상담을 해야 한다며 10여 분간 앉아있다 갔다. 그는 휴대폰을 보며 내게 다신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퇴원 후 집에서 엄마와 2차 상담을 했다. 엄마는 내 방을 살피다 보온병을 열어보고 놀랐다는 말로 운을 뗐다. 난 정신과 의사에게 하던 대로 허술하게 사건 경위를 읊었고 엄마는 더 물을 것 없이 말했다. “그래도 걔가 널 좋아해서 그랬나 보네. 그래도 넌 그러면 안 되지. 넌 우리 가족을 다 버린 거야.” 난 다신 그러지 않겠다고 또 말도장을 찍었다.


그렇게 개 짖는 소리는 멎었다. 병가를 낸 동안 고깃집에서 연락이 와 그가 내게 보온병을 돌려달라더라는 말을 전했다. 그래서 그 보온병을 어쨌더라. 가물가물하지만 고깃집에 그만두겠다고 말하러 간 날 전달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개는 밤마다 혀를 물고 끙끙댔다. 보온병 하나 손해 보지 않고 멀쩡히 지내는 그의 앞에 나타나 얼굴 가죽을 형체도 안 남게 물어뜯어버리는 꿈을 매일 꾸었다. 하도 이를 갈아대서 날카롭던 이빨은 제풀에 닳아버렸다. 그 뒤로도 몇 번 더 혀를 깨물게 만든 주자들이 개의 시간을 통과하며 개의 하늘에 개 같은 별자리를 수놓았다.


자기 혀를 깨물고 깨물다 꼭지가 돌아버린 미친개들이 목청을 북돋운다. 왕왕 으르르렁 컹컹! 여기저기서 내짖는 하울링이 아파트 벽에 메아리치자 자다 깬 자들이 짖어댄다.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개 짖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하라는 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는 아비규환 3단지. 개와 개 아닌 자가 전복되는 밤하늘에 지랄발광의 토사물이 불꽃처럼 터진다. 보온병에 쉬어빠진 미역국을 퍼 담아 쏘아 올리는 축제의 밤. 이 세계에서 사람을 만드는 건 매너가 아니라 지랄발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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