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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최 Mar 26. 2022

나의 쓸모는

#감응의 글쓰기 20기 5차시 과제

“사장님이… 내보내라고 하시는데.”

팀장이 날 옥상으로 불러내 퇴사 권고를 전했다. 첫 직장 입사 3개월 차에 받은 경고였다. 팀장은 덧붙여 말했다.

“그렇다고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어요. 당최 씨의 의견이 가장 중요해요.”

사장 눈에 나의 싹수가 노래 보였을까. 난 부끄러워야 할지 분해야 할지 황당해야 할지 알지 못했고 조급하게 지난 3개월을 돌아보았다. 업무일지를 자세히 쓰라는 지적을 몇 번 받았던 게 떠올랐다. 아, 그랬구나.


전 직원이 매일 쓰는 업무일지를 사장님은 매일 아침 탐독했다. 업무일지는 회사 안의 자신의 역할과 쓸모를 설득하는 전상서였다. 왜들 그렇게 퇴근시간이 지나서도 4시간씩 업무일지를 쓰느라 야근하는지 그제서 납득이 되었다. 업무일지는 매일매일 마감하는 연구 리포트이자 에세이였다. 안 되면 일기라도 써야 했다. 전쟁사료 같은 업무일지 더미 사이에서 나의 업무일지는 너무 간략하고 안이했으며, 거기엔 내가 이 닭장 같은 사무실에서 감히 한 책상을 차지할 자격이 있음을 입증하려는 절박함이 없었다.


내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 팀장의 말에 지금도 감사한다. 그 덕에 나는 퇴사 권고를 거부할 수 있다는 선택지를 가질 수 있었다. 나는 나갈 수 없다고 뜻을 전하고 그 뒤로 매일 소설을 쓰듯이 업무일지를 작성했다. 질은 어차피 함량미달이니 양을 불리는 게 중요했다. 순간순간 스치는 자잘한 파편 같은 생각까지 낚아채 의미를 부여하며 한 줄이라도 더 채울 문장으로 만들었다. 이따금 주말에 출근해 월요일에 해도 되는 업무를 했고, 어쩌다 사장에게 그 모습을 목격당하면 내심 잘됐다 싶었다. 그렇게 나는 그 회사를 구성하는 평범한 직원 일명이 되었다.


그 일이 백신처럼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뒤로 옮기는 회사마다 일을 그럭저럭 잘 해냈다. 사내 권력구도를 읽는 정치력이랄지 타고난 친화력 같은 축복은 내게 없었다. 나의 전략은 유용한 일개미가 되어 퇴사 권고가 와 닿을 수 없는 멀고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내 업무일지를 읽던 사장의 관점, 내게 업무를 지시하는 상사의 관점, 내게 일을 맡기는 클라이언트의 관점 등 갑의 관점을 체화해 업무를 수행하면 사람들은 그가 일을 잘한다고 여겼다. ‘일잘’이란 자의식은, 내가 만약 ‘일못’이라면 너희가 내보내기 전에 내가 알아서 나간다는 비뚤어진 전제와 함께 형성됐다. 이른바 ‘퇴사는 내가 한다.’ 오장육부를 갈아 바쳐야 하는 직장에서 그 문장만이 내가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자존심이라 여겼고, 내 운신만은 회사가 아니라 내가 결정한다는 신념을 보증금처럼 간직했다.


참 쓸데없는 것에 온 자존심을 부여해왔다.


어느 회사에 다닐 적, 임원들의 보이지 않는 다툼이 있었다. 20명 규모의 작은 출판사였다. 사장 이하 최고 권력자는 상무였고 그 아래 편집 1팀과 2팀 각 부장이 있었다. 2팀은 상무 라인으로 노선을 정했으나 1팀은 상무에게 쉽지 않은 견제 대상이었다. 나는 1팀 소속이었다.


상무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1팀 실무자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 팀을 흔들곤 했다. 부장 말고 자신에게 직접 보고를 하라고 하는가 하면, 실무자를 자기 방으로 불러다 질책하며 부장을 허수아비로 만들기도 했다. 한때 난 상무와 코드가 잘 맞던 시기가 있었는데, 돌아보면 그땐 같은 팀 과장님이 상무의 타깃이었고 그 과장님의 자존심을 뭉개서 퇴사를 이끌어내는 데 내가 이용된 것이었다.


어쨌거나 본격적으로 상무와 부장의 대결 구도가 됐다. 난 인간적인 애정과 일적인 교감이 있는 부장님 편에 섰다. 1팀은 공격적으로 기획안을 올렸고 나도 거기 가세했다. 상무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곧 상무와 나의 개인 면담이 시작됐다. 상무는 이제껏 쳐낸 직원들에게 그래왔듯 내게도 총공세를 펼쳤다. “너는 이 일이 잘 맞는 것 같아?” “너는 이 일이 왜 좋아?” 함정을 파놓고 유도하는 질문들. “대체 하고 싶은 게 뭐야? 궁금해서 그래.” 내가 이제껏 해온 일이 없는 양 천진하게 묻는 질문들. 한편으로 내 지난 모든 업무를 되짚으며 그때 그것은 왜 그랬는지 묻는 추궁의 질문들도 있었다. 회사가 치른 시행착오 과정은 과거 완료 시점이 되니 담당자의 무능이 되었다. 일견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명백한 실수와 과실들이 있었고, 하나둘 인정하다 보니 점점 내가 인정해야 하는 범위가 넓어졌다. 그러다 보니 나는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경력자가 갖춰야 할 노련함 대신 자기 쪼만 남은, 매너리즘에 빠져 닳고 닳은 재주로 이 회사 저 회사를 전전하는 무능력자였다. “생각해보고 내일 다시 얘기해.” 면담을 끝내는 이 말이 지옥 같았다.


“퇴사하겠습니다.” 상무는 내 입에서 그 말을 끄집어내는 데 성공했다. ‘퇴사는 내가 한다’는 신념은 그런 식으로도 구현될 수 있었다. 난 내가 자존심을 지킨 것인지 얻어맞다 도망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오래 앓다 들어간 새 직장에서 난 내 가치가 한껏 고양되는 반전을 겪었다. ‘뭐야, 나 일할 수 있는 사람이었네.’ 그러나 내가 다운되는 지점은 늘 나의 축소된 역할을 자각할 때였다. 이 팀엔 이제 내가 필요 없다고 느낄 때쯤 예전 회사에서 상무를 물리치고 권좌를 차지한 부장님이 날 불렀다. 난 지체 없이 부장님이 새 판을 짜놓은 회사로 옮겼다. 그러나 들어가 보니 같은 회사였다. 상무 위치에 내가 흠모하던 부장님이 조금 다른 모습으로, 유일한 존재로 있었을 뿐이다.


그 조금 다른 부장님의 면모 때문에, 마음껏 상무를 미워하고 욕하던 때와 달리 이번엔 화살이 나 자신에게로 빗발쳤다. 그 와중에 팀엔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사장 아들도, 부장님께 구박받기 일쑤인 부장님의 친동생도 있었다. 회계팀엔 사장님의 아내와 처제가 있었다. 회사 분위기는 더없이 화목했고 누구도 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함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나만 느끼는 것인가. 대수롭잖은 일인가.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인가. 다들 괜찮은가. 이상함을 느끼는 내가 이상한가.


종일 심장이 요동치고 피부가 화끈거리면서도 몸은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앉은 자세는 점점 모니터를 파고들며 작아졌다. 신경정신과에서 약을 처방받아 점심시간마다 화장실에서 삼켰다. 그러고 나면 한동안 식도가 쓰렸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 있을까. 이러다 나아질까. 다들 이렇게 다니는 걸까. 막연한 생각들이 부유하던 중 회의 때 말이 나오지 않는 몇 번의 경험을 하고서 난 정상적으로 일을 할 수 없겠다고 판단했다. 초라한 모습으로 도망치자. 나는 오로지 그곳을 벗어나는 게 전부인 양 부랴부랴 퇴사했다.


그것으로 끝일 줄 알았던 순진한 나. 내 앞엔 내가 망한 원인과 탓을 찾아 전 생애를 되짚는 긴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여정에서 이제 얼마쯤 왔을까. 태어났다는 것만으론 부족하다는 생각의 씨앗은 언제 어디에서 싹튼 걸까. 역할과 쓸모로써만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여기는 이 심리가 어디에 기원하는지 여전히 숙제다. 성장과정에서 어딘가 해소되지 못한 인정욕구가 있는지, 어릴 때 조숙했던 아이가 성인이 되어 겪는 의존증의 문제인지. 그게 밝혀지면 뭐가 달라질지.

그래서 생각한다. 0이 되자. 끝내 제거되지 않는 내가 나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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