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정치처럼 작동한다.

릴리의 “괜찮아”가 정치적 언어가 될때

by 마카롱 캡슐 소녀

왜 관계를 정치로 보지?

모든 관계는 감정으로 연결되지만, 감정은 언제나 평등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누구의 감정은 더 들어줘야 하고, 누구는 감정은 덜

말해야 한다는 위계적 기준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기준은 단순한 예의나 질서가 아니라, 감정 표현의 권리가 인정될 수 있는가에 대한 구조적 결정이다.


그렇기에 관계란 ‘정서적 친밀함’ 이전에, 감정 표현의 정치적 공간으로 작동한다.

감정이 권리로 인정받는 순간은 관계에서

민주적 공간을 만나기도 하고, 감정이 통제받는

느낌이 드는 관계는 권력적 질서기억이 재현된다.


감정과 관계는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지?

감정은 타자와 연결될 때 비로소 자기 정당성을 획득한다.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이 잠시 관계 속의 위계를 내려놓고, 그 감정을 말하고, 들어주려는 능동적인 태도를 가질 때 그들의 언어는 존재기쁨으로 환원되는 순간이 된다.


“그건 속상했겠다.”
“너도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지.“

이런 말들은 단순한 반응적 공감으로 흘러갈 수도 있지만, 그것이 감정을 권리로 받아들이는 태도와 만나는 순간,
감정은 단순한 표현을 넘어서 존재의 언어로 작동하는 사회적 사건이 된다.

감정은 그 자체로 진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서로의 권리로 수용되고 인정받을 때,
비로소 존중의 질서 안에서 정당성을 획득하는 경험이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계는 그런 언어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부모와 자식, 친구, 연인 사이에도 역할과 기대, 위계 구조, 도파민 기반의 예측 안정감이 감정 표현을 미리 조율하고 억제해버린다.

감정은 제자리에 흐르지 못하고, 역할 수행에 맞춰

조정된 ‘정치적 감정’으로 변형되며 기능화된다.
그렇게 감정은 더 이상 나의 존재에서 비롯된 언어가 아니라, 상대의 필요에 의해 쓰이는 정치적 가공 상품처럼 다뤄진다.


정지적 언어-"괜찮아"

영화 <릴리와 찌르레기> 에서 릴리와 잭의 어린 딸 케이티는 영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다. 건강하던 아기가 특별한 예고 없이 잠든 사이 숨을 거두는 이 질환은, 부모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충격과 상실을 남긴다.

남자주인공 잭은 이 죽음을 자신의 책임처럼 끌어안으며 깊은 죄책감 속으로 빠져든다.
“내가 아침까지 자지 않고 케이티를 지켜봤더라면…”
그는 그런 자책을 반복하다가 결국 자살을 시도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러나 여자주인공 잭의 부인 릴리는 “괜찮아”라는 말을 통해 감정을 억압하는 정치적 언어를 수행한다.
어린 딸을 잃은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남편의 상태를 먼저 걱정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집중잘해요”, “괜찮아요” 같은 말을 반복한다.
자신에게 닥친 비극을 마치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덮어두려는 태도로, 그녀는 온몸으로 감정을 외면하고 단단한 일상의 얼굴을 주변에 보여준다.


릴리에게 감정은, 말하는 순간 그 고통이 현실로 되살아나며 자기 전체를 휘감는 무게로 밀려온다.
그 무게는 감당할 수 없고, 통제 불가능하기 때문에
릴리는 관계 안에서 침묵을 선택한다.

그 침묵은 단순한 회피가 아니며, 감정을 말하지 않는 일은 이미 오래된 생활 방식이고, 비극 이전부터 감정을 드러낸 뒤, 관계 안에서 마주했던 처절한 반응의

기억들이 차곡히 쌓여 있다.

그래서 그녀는 차라리, 관계 속 정치적 질서를 유지하는 편을 택한다. 역할에 기대어 감정을 포개고 일상을 이어간다.


<릴리와 찌르레기>

남편 잭을 병문안한 날, 집단 상담 시간의 한장면


한 상담사가 릴리에게 조심스럽게 묻는다:

“이렇게 부부가 떨어져 지내면...적응하기 힘들지 않으세요?”

릴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익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저희는 괜찮아요.” 저희는 그런 문제 없어요.

그 말은 단순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건 릴리가 자신의 감정을 다시 한번 정치적으로

감정을 통제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고통을 말하지 않는다.

남편 잭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주변 사람들은 말 대신 눈빛으로 릴리의 침묵을 바라본다.
그 눈빛은 질문보다 더 많은 것을 묻고 있었고,
릴리는 그 시선을 외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
다시 “괜찮은 사람”의 얼굴을 꺼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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