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비 Jun 01. 2022

K장녀의 방

K장녀는 아프다.

우리 집엔 K장녀가 산다.

예부터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첫 맏딸인 장녀가 부모님 같은 존재였다. 옛 어른들의 대부분은 농사일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낸다. 현대 사회에서는 의학의 기술을 빌려 아무리 노력해도 잘되지 않는 수정이 옛날에는 왜 그리 잘됬는지.. 한 집에 아이 다섯은 기본인 것 같다. 외할머니만 봐도 형제, 자매가 7명이다. 정말 상상도 안 가는 숫자다.

문제는 줄줄이 아이를 낳기만 했지 도무지 돌볼 형편이 못된다. 숟가락이 늘어나면 그만큼 쌀도 줄어든다. 아이들의 주린 배를 채우기엔 농부라는 직업은 너무나 잔인하다. 정말 가난한 먼 옛날 농부들이 집안을 꾸려나가기엔 참 힘든 사회였다.

K장녀는 동생들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일하러 나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육아를 시작한다. 그렇게 첫째, 둘째, 셋째... 연이어 동생들을 제 자식처럼 키운다. 너무나 당연하게 엄마의 역할을 대신하는 딸로 살아왔다. 그러니 성인이 되어 회의감이 몰려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희생은 늘 당연했고 감당해야만 했었다. K장녀한테는!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우리 집 K장녀는 어떨까. 내가 지켜본 우리 집 K장녀는 늘 한결같다. 한결같이 가족들과 소통하지 않고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슬퍼도 아파도 기뻐도 늘 똑같다.

내가 알고 있는 K장녀와는 다른데....


어릴 때 동네 친구와 틀어져 놀고 싶어지지 않았다.

둘째 언니와 나는 문을 걸어 잠그고 친구 친척 언니가 와서 계속 말을 거는데도 모르는 척했다. 친척 언니가 화가 나서 K장녀의 방에 가서 소리친다.

동생들 관리 똑바로 하라고. 너무 미안했다. 괜히 우리 때문에 K장녀가 피해를 본다.  시간이 지나고 K장녀가 방에서 나온다. 그냥 똑같다. 조용히 할 일만 하고 방으로 다시 들어간다.


우리 집 K장녀가 사춘기에 접어들고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다.

누구나 그렇듯 사춘기는 마음의 변화가 심했던 때이다. 혼자 방을 쓰는 K장녀는 갈수록 말이 없어졌고 늘 방에 혼자 있었다. 엄마 말로는 고등학교 때 검도 배운다고 검도채를 가지고 다니면서 학교생활을 했다고 한다. 집 밖의 생활은 그래도 말도 하고 자유로웠던 것 같다. 집만 오면 방에 들어가 있는 K장녀.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하게 된 K장녀. 점점 어두워져만 간다. 사회라는 현실 속에 혼자서 덩그러니 버려졌으니 참 힘들 법도 하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어떠한 자격증도 없이 취업을 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줄줄이 동생들이 어리니 대학교 보내달라는 말도 못 뱉었을 것이다. 그때 얼마나 막막했을지 안 봐도 훤하다.

우리 집 장녀니 대학교를 보내도 됐을법한데. 그러기엔 부모님이 너무 무지하셨다. 평생 농부로 살아왔고 그릇이 큰 삶을 살지 않았기에 더 폭넓게 생각을 못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 집 K장녀는 우리 집 1호로 세상에 나갔고 어떤 이해도 받지 못하고 홀로 맞서게 되었다.


엄마가 양손 수술을 하셨다.

누군가 집안일을 대신해야 하고 수술한 엄마를 돌봐야 한다. 우리 집 K장녀는 엄마가 퇴원할 때 마지막에 한번 들렸다. 그리곤 생활하는 기숙사로 향했다. 그날 본 언니의 모습은 그냥 많이 아파 보였다. 도움이 필요한 어린아이처럼.. 그 누구한테도 손을 벌릴 수가 없다. 다들 너무 아팠으니까.


오랜만에 집에 K장녀가 있다.

그때 화장품 판매 업자가 화장품을 팔러 우리 집에 들렀는데 언니를 붙잡고 열심히 설명한다. 역시나 우리 집 K장녀는 그 특유의 무표정으로 거절도 수락도 하지 않는다.  답답한 나는  마을 회관에 가 있는 엄마에게 갔다다오는 척하며  "언니 엄마가 얼른 오래~"하고 화장품 판매업자를 보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언니는 전혀 소통하지 않는다. 그냥 말없이 돌아설 뿐.


반려자를 만나 결혼한 K장녀.

나에게도 조카가 생겼다. 작고 귀여운 조카가 집에 올 때마다 참 많이 귀여워했다. 난 언니가 누굴 보고 그렇게 활짝 웃는 걸 본 적이 없다. 딸, 아들을 볼 때 언니는 더없이 행복하다.

큰소리 한번 내지 않고 활짝 웃는 K장녀.

난 그때 알았다. 함께 지낼 때의 언니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도 똑같이 아프고 힘든데 장녀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걸 기대하고 바라는 가족들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걸 자처했던 것이다.

그냥 그 무엇도 바랄 수 없게.


우리 집 K장녀는 아무것도 안 하는 줄 알았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자리는 매우 중요해서 아무나 둘 수 없다.  버티는 것만으로도 그 자리는 이미 자리는 채워진 것이다. 누구나 사연은 있듯 우리 부모님에게도 많은 사연이 있다. 그 기막힌 사연을 다 알고 실제로 지켜봐 왔다. 상처 속에서 보낸 지난날들을 꺼내는 일이 참 어렵다. 부모님을 지켜봐야 했고 동생들을 생각해야 했다. 그냥 선택한 것이다. 너무 무겁다. 아프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게 되자.

진작에 성숙해져서 언니를 도와줬으면 참 좋았을걸. 후회하는 마음이 밀려온다. 사실 이렇게 보수적이고 외길만 걷는 집안에서의 변화란 너무 많은 부딪힘이다. K장녀는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고 도와주지 못하는 부모님과 동생들이 싫었을 것이다. K장녀를 보며 느끼는 그 복잡 미묘한 감정은 그냥 서랍 속에 넣어두자.

K장녀의 아픔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작가의 이전글 해 질 녘 바다와의 만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