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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May 02. 2022

부모가 아닌 나를 선택했다.

전지적 딸의 시점

평상에 누우면 하늘이 늘 파랗다. 

어느새 저만치 있던 구름이 정면으로 보인다. 바람이 부는구나. 이내 먹구름이 끼더니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  시골집에서 맞이하는 비는 흙냄새로 가득하다. 긴 풀잎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제 할 일 하고 있던 달팽이는 껍질 속으로 숨어버린다. 바람이 불고 빗물이 떨어지면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줄 껍질 속으로.

학교에 들어간 후로는 동네 친구들도 한가하지 않다. 이제 이 나라가 정해놓은 정규 교육과정을 거쳐야 하고 내게 주어진 역할을 해야 한다. 모두 바쁜 생활을 하는데 나만 하늘을 보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에서 뒹굴 거리다 지겨워지면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다니는 정말 한량 같은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런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우리 아이들은 참 많은 교육을 받고 할 일이 너무 많아 생각할 시간이 부족해 보인다.


전화벨이 울린다.

엄마의 섭섭한 목소리. 딸이 셋씩이나 있는데 집에 자주 들러보지 않는 게 너무 섭섭하시단다. 몇 해 전 시골 단독 집에 살다 아파트로 이사를 가셨다. 아파트는 확실히 관리를 해주니 편하긴 한데 시골 노인들이 살기엔 적적하다. 노인정도 있고 주민센터 문화강좌도 있지만 코로나로 인해 닫혀버린 그 모든 것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제 기능을 한다 해도 문화강좌의 노래교실이라도 가서 즐겁게 지냈으면 좋겠는데 그것마저 탐탁지 않아하신다. 그 마음은 백번 이해하기 때문에 불편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사실은 많은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곳도 인간관계라 사제간의 도리를 바란다. 강좌를 듣는 사람들끼리 돈독하길 바라고 함께 시간을 보내길 원한다. 나는 내가 배우고 싶은 강좌의 강의만 듣길 바란다. 배우는 건 너무 좋아하는데 흔히들 하는 인간관계를 맺질 않기 때문에 그 강좌에서 도태되고 왕따가 되고 만다. 몇 번 불편함을 겪고 나니 다시는 강좌를 듣고 싶어지지 않았다. 그냥 어느 관계든 쿨하게 안녕할 수 있으면 바랄 게 없겠다.



부모님에게 이것저것 권해보지만 이내 결론은 자식들에 대한 불만뿐이다. 

나는 한 시간 반 거리 떨어져 살고 언니들은 바로 코앞에 사는데 전화해서 하소연하는 것 보면 사실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다. 언니들은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사실 참 많이 바쁘다. 첫째 언니는 친정 부모님께 살갑지 않은 편이고 둘째 언니는 전화도 자주 하고 아이들과 집에도 자주 가는데 그걸로 만족 못하시나 보다.

셋째인 나에게 늘 기대하시는 마음이 컸던 엄마가  지금까지 나에 대한 끈을 못 놓는 건 나한텐 너무 불편한 일이다. 결혼하면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는 말들은 내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부모가 돼보니 난 부모님이 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길에 욕심이 많았던 내가 결국 결혼을 선택하고 쫓기듯 가버린 건 내 부모의 영향도 크다.

부모님은 늘 바쁘셨다. 그 옛날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할 수 있는 일들은 많이 없었다.  배 농사, 쌀농사, 하우스 농사를 지으며 지금껏 잘 버텨오셨고  우리 세 딸들도 특별히 문제나 사고 없이 자랐다. 아니. 문제나 사고를 만들지 않았다. 



부모님의 보이지 않는 사연은 구구절절하다.  

난 친할머니가 없다. 길을 지나가다 엄마가 어떤 할머니에게 인사하라고 얘기했던 게 전부였고 명절 때마다 같이 한 끼 먹는 게 전부였다. 할머니라고는 하는데 가까운 건지 먼 건지 알 수 없는 사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빠를 입양한 양엄마였던 것이다. 좋은 인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바람에 돈문제에 객기에.. 함께 잘 지낼 수 없는 사이가 돼버린 것이다.

친 자식들은 우리 부모님에게 노모의 양육을 떠 맡겼고 없는 살림에 도움도 되지 않는 양 시어머니를 책임져야 했다. 능력이 많지 않았던 아빠의 뒤를 보필하느냐 늘 빠듯했던 엄마. 삶의 구구절절한 사연은 이것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를 챙기기도 바빴던 그 시절에 세 딸은 그냥 스스로 잘 자라주기만을 바라 왔다. 덕분에 세 딸은 조용히 문제없이 자라는 대신 그 이면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슬픔으로 가득 차 버리게 되었다. 난 문제가 생겼을 때 뭐든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의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도움을 받는 일이 사실 지금도 어색하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할 때까지 오로지 달리기만 했기 때문에 막상 진짜 달리기를 해야 할 땐 힘없이 무너져 버렸다. 그래서 선택한 게 결혼이었다.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냥 내 남편 될 사람의 등판을 보는데 우리 집을 감당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부모님의 열등감을 감당해줄 만한 사람같이 보였다.

직업 좋은 사람, 잘난 사람, 집안 좋은 사람 등.

그들의 조건은 사실 나한테 중요하지 않다.

어떤 사람이든  그들을 높은 곳에 데려다 줄 사람은 나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려하던 엄마의 열등감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상견례 자리에서  격 없는 행동으로 모두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조씨집 안타령에  본인 딸 자랑만 늘어놓고 먹지도 않는 콜라비를 자랑하며 너도 나도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것이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였다. 엄마는 언니들에게 관대하고 조심하는 부분을 나에겐 적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난 돌아와서도 엄마에게 한마디 하지 못했다. 그냥 내가 모르는척하고 내가 감당해야만 편해지기 때문이다. 나와 시댁 어른들만 불편하고 눈치 없는 친정식구들은 아무 일 없다.

부모님이 여태껏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는 너무도 잘 안다. 단지 이유는 그거 하나다. 내가 감당할 수밖에 없는 그 모든 일들이 내 기억 속에서만 묻혀야 한다는 것을. 아직도 착한 아이 증후군에 시달리는 나는 그렇게 또다시 마음의 짐을 지고 말았다.

내 인상이 좋았을 리 없는 시댁 식구들. 여전히 철없어 보이는 나.

여전히 홀로 설 수밖에 없었다.


결혼 생활을 하며 얻었던 건 멀리 떨어져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이렇든 저렇든 내 몸뚱이 하나 가지고 결혼을 선택했어도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내 일을 시작할 수 있고 내게 주어진 일들을 빈틈없이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는 걸 알았다.

아이가 생기고 감당할 수 없을만한 일들이 많이 생기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열등감에 시달리는 친정엄마가 부담스러웠다. 사실 많이도 밀어냈다. 이 말 저말 들을 바에야 내가 혼자 감당하고 싶었다.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라고 대접받고 싶어 하고 며느리 일 도와주는걸 참으로 싫어하셨다. 남편은 남편대로 본인은 돈을 벌어오니 내가 육아를  다 감당하기만을 바랬다.

지금까지도 옛일로 다투는 날엔 남편은 얘기한다.

" 친정엄마, 시엄마, 내가 참 한 일도 없겠다.  "  

장모님 가끔씩 애 봐주고 시어머니 용돈 주고 이것저것 사주는 것에 대해선 생각도 안 하느냐는 저 뉘앙스.

본인도 애들에 대한 추억이 많다며 큰소리치는데 내가 서운한 포인트를 집 질 못한다.

정말 모른다. 진짜 필요할 때 기저귀 한 번 갈아주고  병원 가라고 시간 내주는 그 사소함을 바랐던 거다.

돈이나 명품백 같은 거 필요 없다. 돈은 늘 없어왔고 항상 자급자족했기 때문에 기대하지 않는다. 그냥 애 볼 때 마음이라도 편했으면 좋겠다.


나에게 금쪽같은 내 새끼가 생기고 갈수록 내 마음은 아이에게 향했다. 

나의 어린 시절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그 연결고리를 끊어버리고 싶었다. 아이들이 좀 편하게 갔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내 손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엄마의 손이 탄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다른 주위 엄마들보다 두배로 움직이는 그런 엄마가 되기 시작했다. 동화책을 손에 놔본 적이 없고 목이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서도 애 둘을 앞뒤로 업고 안으면서 그렇게 키웠다.

혹여라 마음이라도 다칠까 전전긍긍해하며 늘 날이 곤두세워 있는 채로 벌써 10년이 흘렀다.

키우다 보니 마음속에서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내 아이가 걸음마하다 넘어지기만 해도 속이 상하는데 내 부모는 왜 그리 날 아끼지 않았을까.

왜 자식들이 아닌 양 시어머니를 택했고 외할머니를 선택했을까.

부모님의 힘든 상황은 자식들이 만들지 않았다. 나 때문에 힘든 것 같아  숨죽이고 살았던 시간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나를 버리지 않은 것만으로 무조건 감사해 야만 할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이를 양육할수록 더 이해가 가지 않는 게 내가 단순히 철이 없어서일까..



사실 자책도 많이 하고 고민도 많이 했다.

자식의 도리를 무조건 저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이제 내 삶을 살기로 결정했다.

더 이상 착한 딸이 아닌 내가 원하는 걸 선택하는 딸이 되기로 했다.

부모님의 삶은 부모님의 것. 내 삶은 나의 것.

내 아이들은 성인이 될 때까지 꽃같이 키워줘야 할 나와 남편의 몫.

그렇게 스스로 정리를 했다. 그리고 양가 부모님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기로 했다.

아직도 나의 부모님은 대학교 졸업하고 일 년 만에 시집간 나에 대한 실망이 가득하다. 본인들의 외로움을 채워주지 않고 나의 삶을 선택한 나를 인정하기 힘드신가 보다.

아직도 나는 착한 아이의 기질이 많은 사람이지만 조금씩 변해가는 연습을 하고 있다.

더불어 내 아이들에게 항상 얘기한다.

 "어디 가서도 할 말 하며 살아. 말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리고 엄마가 도와줄 테니까 너희가 하고 싶은 거 해.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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