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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Jun 30. 2022

장마가 시작되었다.

새벽녘 모진 빗소리로 눈을 뜨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지 않을 뿐이지 하늘은 자기들끼리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았다.  구름 병사들의 전쟁에  인간계 사람들이 새우등 터지듯. 지금도 전쟁은 진행 중이다. 밤잠을 자주 설치는 탓에 자주 깨는 편인데 오늘은 지붕 위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눈을 뜨게 만들었다.  조용히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 옛날 자라왔던 어린 시절이 퍼뜩 생각이 났다.


시골 마을에서 자란 탓에 자연의 모든 것을 잘 즐기면서 살았다. 당시 우리 집은 큰 개울을 끼고 있었는데 비가 엄청 오는 장마철이 되면 범람할지 몰라 피난을 가곤 했다.  하루는 밤새 쏟아지는 비의 양을 이기지 못하고 위쪽 마을 저수지의 수문을 열어 놓는 바람에 아랫마을인 우리 개울이 정말 바다와 같이 넘실대고 있었다. 물줄기를 따라 물이 넘어오는 끝을 바라보는데 그 거대한 흙물의 양은 저 멀리 북한에서부터 내려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만큼 어마어마했다. 이미 지대가 낮은 밭과 집들은 모두 물에 잠겨 있는 상태였고 옥상의 끄트머리만  간신히 보이고 있었다. 어디서 오는지 모를 각종 쓰레기들과 굵직한 물건들은 여기저기 물난리로 몸살을 앓고 있구나 생각이 들만큼 어무무시했다.

 

새벽녘  동네 어른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져 갔다.

현관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다.

" OO아. 얼른 일어나. 개울이 넘치고 있어!" 동네 어른들이 곤히 자고 있는 우리 집 현관문을 두들기로 나섰다. 깨어보니 동네는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밤새 내린 비로 어디론가 피난을 가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미 대피를 한 식구들이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피난을 가지 않았다. 그 새벽에 움직이지 않은 가족은 우리뿐이었다. 다행히 비는 점차 그치기 시작했고 그날의 상황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그날 아침 넘쳐나는 개울을 보러 밖으로 나갔다. 주변을 살피는데 아랫동네는 벌써 물에 잠겨 있고 집 앞의 하우스는 물이 들어와 농작물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산을 쓰고 한 걸음 내딛는 내  발아래  흙 구덩이에는 빗물이 예쁘게 고여 있었다. 한참을 물을 튀기며 미소를 지었다. 비 오는 날만이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은 지금뿐이리라. 둑길을 향했다. 둑길에 서지 않아도 먼발치에서 보이는 개울물.

사실 개울이 아닌 바닷물을 보는 것 같았다. 비가 그치지 않았으면 정말 넘쳤겠구나 싶었다. 아직도 저 멀리서 내려오는 짐짝 같은 물건들을 보는데 주인이 놓쳐버린 안타까움이 저절로 느껴졌다.

자연의 잔인함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그때 느꼈다.

그리고 생에 한 자락의 운명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함께 했다. 결국 그 비에 타협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문 우리 가족처럼...


이렇게 비가 무시무시하게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주부로 살아가는 오늘. 노트북을 두들기며 창밖을 바라보는 나의 모습은 그 기억조차 아픔보다는 추억으로 느껴진다.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는 이 시간이 나에게 어찌 보면 사치로 느껴졌다. 그 옛날 비 오는 날 창 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얼마나 있었던가. 비로 인한 기분 좋은 시간보다 삶을 위협받는 상황들이 더 많았고  내리는 비에 야속함을 더 느꼈었다. 내리는 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건 그 어린날의 기억들 덕분일 것이다.


지금은 사실 비가 이벤트처럼 느껴진다. 노트북을 두들기고 책을 읽는 나의 하루는 사실 플렛의 견고함을 느껴지게 만든다. 늘 잔잔한 삶을 살다 보니 가끔 내리는 비와 눈은 이벤트이다. 요새 같이 장마철이 오면 빗소리에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고 그냥 기분이 좋아지는 건 특별함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안전한 집의 테두리에서 비를  맞을 일도 없고 당장 먹을 것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 나를 뿌듯하게 만든다. 내게 욕심이 없다고 얘기할 수 도 있지만 몸과 마음이 다치는 것보단 이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모든 주어지면 너무 열심히 하는 성격 탓에 될 일도 안되고 아프기까지 하는 나의 과거의 모습을 되돌아볼 때 내려놓는 것만큼 괜찮은 처방은 없는 것 같다. 내리는 비를 보고도 오만가지 생각을 해대는 나의 머릿속이 텅 비어질 때까지 글을 쓰며 비워 내는 작업을 해야 할 것 같다.


내리는 비만큼 시원하고 개운해지는 그날이 오면 한층 더 견고해진 나의 글쓰기를 기대할 수 있고 또 다른 재미난 밑 작의 얘기들이 나를 즐겁게 해 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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