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과 하우스가 있는 시골 동네에는 손수레를 흔히 볼 수 있다.
손수레는 농사를 짓는 어르신들에겐 참 유용한 운송 도구이다.
시골 어른들은 보통 구르마라고 부르는데
흙을 실어 나를 때도 물건을 나를 때도 어디든 척척 가주는 손수레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다.
두발보다 외발의 손수레가 훨씬 기특해 보이는 건 외발이지만 하중을 모두 견디면서도
일에 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두 발에 비해 한 발은 밭고랑 같은 좁은 곳에서도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원하는 물건들을 실어 나를 수 있다. 균형이 잘 안 잡힐 것 같지만 다루는 사람의 재주에 따라
어떠한 물건도 다 실어 나를 수 있다.
여러 가지 장점을 잘 아셨는지 아빠는 외발 손수레를 구입하셨다.
노란 플라스틱 몸통에 굳세게 버티고 있던 외발. 아빠의 오래된 동료이자 친구이다.
배 과수원을 하셨던 부모님은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바빠지기 시작한다.
겨우내 부모님 손길이 가지 않았던 과수원을 정리를 하고 생계를 위해 자식들보다 먼저
챙겨야만 했던 배나무가 다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소독할 준비를 한다.
그렇게 배나무의 안녕을 생각하고 관리하는 부모님을 보면서 우리 가족은 봄을 맞이한다.
멀리서 배 과수원을 바라보면 그곳만 하얀 눈이 내린 것 같았다.
가까이서 보지 않아도 향긋한 향이 사방으로 멀리 퍼지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꿀벌이
하나둘 날아다니는 모습이 상상이 된다.
예쁘게 피운 꽃들만 보면 올해 농사는 문제없을 것 같지만 낭만 섞인 착각은 잠시 넣어도 좋다.
겨울철엔 새봄이 왔을 때 서로 부대끼지 않게, 햇볕이 골고루 잘 들게끔, 맛있는 열매를 맺을 수
있게끔 가지치기를 한다. 그렇게 봄을 기다린다.
그곳에서 작은 배 열매를 귀하게 키우기 위해
봄부터 배나무와 함께 하시는 부모님의 본격적인 노력이 시작된다.
꽃이 피면 벌레들이 꽃과 나무를 상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소독을 시작한다.
드럼통만 한 곳에 소독약과 물을 섞어 소독통을 메고 골고루 소독을 하시던 아빠.
그런 아빠를 늘 보필하며 뒷일을 책임지셨던 엄마.
서로 의견을 내가며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조율도 해가며 배꽃이 열매를 맞을 준비를 단단히 해두신다.
하나둘 꽃이 떨어지고 작은 열매들이 맺히기 시작한다.
배나무 한그루에 참 많은 열매가 많이도 열린다.
어린 내 눈에 이 많은 배들이 다 크면 우리 집 부자 되겠다 싶었는데.
어느새 긴 사다리가 등장한다.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모두 훑으시는 매의 눈길.
부모님은 더 튼실한 열매를 맺기 위해 열매 5개 중 한 개만 남기고 다 제거해 버리신다.
사다리 주위에서 배외하던 나는 떨어진 새싹 배를 주워 제일 긴 풀의 잎사귀를 따
소꿉놀이를 시작한다.
배 과수원은 아주 낭만적인 놀이터였다.
배나무 잎 몇 장과 바닥에 널린 길쭉한 이름 모를 잎사귀를 따서
훌륭한 접시를 만들어 낸다.
근처 넓적한 돌과 빻을 수 있을만한 길쭉하고 둥그런 돌을 구해와
나만의 레시피로 맛있는 음식을 한다.
새싹 배를 빻고 물을 넣으면 물김치,
넙적한 잎사귀를 알맞게 찢어 배나무 잎 위에 넣고 뱀딸기를 따와
예쁘게 올려놓으면 더없이 맛있는 샐러드가 완성된다.
나의 훌륭한 음식을 과수원 평상에 올려놓고 식당 놀이를 시작한다.
오전을 소꿉놀이로 시간을 보내고 나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부모님은 평상으로 오신다.
집에서 가져온 밑반찬과 밥. 그리고 꼭 빠질 수 없는 라면.
내가 가장 좋아했던 건 미숫가루와 설탕을 탄 물이었는데 미숫가루와 설탕만 탔을 뿐인데 정말 너무나 맛있었다.
부모님은 애지중지 배나무를 돌보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맛있고 나는 소꿉놀이를 하며 시간을 불태우기에
더 맛있는 것 같다.
하루하루 배나무가 정리가 되고 나면 소독을 반복하고 배 봉지를 씌운다.
무럭무럭 자랄 수 있도록 거름도 주고 소독도 해주고 잡풀도 제거해 주면서
벌레는 들지 않는지 하루하루 꼼꼼히 살펴본다.
8월 초중순쯤 되면 이른 배를 수확할 시기가 된다.
부모님과 함께 배밭 놀이터로 향하는 발걸음이란.
우리 집의 유일한 애마인 경운기.
아빠의 경운기 실력은 최고지 않을까 싶다.
과수원에 들어가는 길목이 그렇게 구불거리고 파이고 좁아도 현란한 솜씨로 멋지게 통과한다.
엄마와 나는 앉아서 어디든 꼭 잡고만 있으면 현실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가는 그 길목을
경험한다.
누구든 미지의 세계는 아무나 못 들어간다.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저항하고 투쟁하고 붙들고. 그렇게 버티고 버텨야만 들어갈 수 있다.
경운기는 특유의 우렁찬 모터 돌리는 소리와 함께 엔진을 가동한다. 마의 고개를 넘을 땐 더욱 힘차게.
우린 그 경험을 하며 미지의 세계. 우리의 과수원으로 향했다.
과수원 평상에 멋지게 자리 잡은 경운기. 이제 우리만의 세계로 들어왔다.
평상에 가져온 짐을 내려놓고 부모님은 분주하게 움직인다.
초록색 장화를 신고 노란색 외발 손수레를 끌고 이른 배를 수확하기 위해 향한다.
배 봉지 안을 살짝 들여다보고 따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고
수확하기 시작한다.
어느새 노란색 외발 손수레에는 수확한 배들이 한가득이다.
외발이라 불안하겠다 싶지만 균형만 잘 잡으면 좁고 험한 길도 문제없다.
우리에겐 외발 수레 운전자 아빠가 있으니까.
한가득 모아놓은 배들을 깔끔한 상자에 정성껏 넣어주는 작업을 시작한다.
배들 중 정상적으로 자라지 않고 반쪽만 있는 배가 있는데 엄마는 그 배를 쪽배라고 불렀다.
또 물렁물렁해서 껍질을 손으로 벗겨먹을 수 있는 배도 있었다. 그 배는 물렁 배.
물렁 배와 쪽배가 나오면 항상 내 차지였다. 비록 상품 가치가 없는 배들이지만 나에게는 늘 맛있는
간식거리였고 부모님에게는 뜨거운 태양볕에서 더위에 지칠 때 수분과 당을 섭취할 수 있는
훌륭한 먹거리였다.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며 수확한 배들을 구분한다.
그동안 나는 소꿉놀이를 하며 여기저기 풀밭을 배회하는데 참외 모양을 한 파랗게 열린 열매를
보고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 여기 참외 같이 생겼는데 파란 열매가 있어"
"그건 개똥참외야. 전에 참외 깎아 먹고 버린 곳에 참외가 열렸어. " 별일 아니라는 듯 엄마는 얘기했다.
난 사실 너무 신기해서 "우와. 진짜 신기하다. 참외가 열리다니!"
그러고 보니 과수원에는 뽕나무, 사과나무도 있었다.
찾아보면 산딸기, 뱀딸기. 심지어 참외까지. 없는 게 없는 만물상 같은 곳이었다.
특별히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작은 열매들도 무수히 많았다.
과수원 놀이터는 정말이지 하루 종일 놀아도 심심하지 않고 배울 것도 많은 곳이었다.
과수원에는 작두펌프가 있었는데 펌프질을 해 물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물을 조달했다.
더위에 지치면 아빠는 펌프 물로 등목도 하고 나는 펌프질이 재미나 몇 번이고 물을 끌어올리며 물놀이를 하곤 했다. 물을 모아 손을 담그기도 소꿉놀이할 물을 실어 나르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루 종일 과수원 놀이터에서 놀고 나면 해가 저물기 시작한다.
배를 정성스레 포장해 넣은 박스는 출하 준비를 마친다.
시기마다 출하할 수 있는 배의 종류는 다르다.
9월에는 올 배. 10월 초에는 신고배. 10월 말에는 늦배.
시기에 맞춰 정성스레 따서 힘없이 깔끔한 배를 잘 구분해 출하를 하면 한해의 굵직한 부담은 덜게 된다.
한평생 흙을 밟고 사셨던 부모님은 누구보다 계절의 변화에 먼저 대응하셨다.
추운 겨울이 되면 배나무 주변을 잘 정리하고 가지치기를 해서 봄을 기다리셨다.
봄이 되면 튼실한 열매를 맺고 병충해에 노출되지 않도록 소독도 하고 거름도 주면서 살피셨다.
여름이 되면 배 봉지를 싼 열매가 잘 자라고 있는지 항상 확인하고 수확을 기다렸다.
가을이 되면 그동안 정성스레 보살핀 배를 수확하고 출하과정을 거친다.
땅에서 업을 얻어 함께 살아가는 건 제일 먼저 자연의 기운을 알아차리는 것과 같다.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와 일조량을 보며 그날의 컨디션을 정하게 된다.
금이야 옥이야 정성스레 보살핀 열매를 출하할 때 사실은 제일 섭섭하기도 후련하기도 하셨을 듯하다.
아마도 부모님은 열매를 맺고 가꾸고 기르고 재배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미리 딸들의 출가를 경험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네 삶과 인생도 결국 자연에서 자연으로 가는
길지만 짧은 여행이지 않을까 싶다.
해 질 녘 집에 와 하루를 정리하는 부모님의 고단함이 내일은 더 즐거워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