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으로 살아갈 준비.
며칠 전 남편의 직장 여후배의 아기를 보았다. 백일이나 넘었을까 하는 조그마한 아이가 카시트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부럽다 못해 질투의 감정을 느꼈다. 여후배는 나와 동갑인데 씩씩하게 아이를 낳은 것을 보면 참 대단해 보이기도 하고 안쓰러운 마음도 들기도 한다. 어찌 보면 좀 늦은듯하게 둘째를 가졌기에 힘들어 보이지만 아빠와 엄마 둘 다 안정적인 직장과 복지가 보장되어 있으니 체력만 받쳐주면 문제없을 듯싶었다.
나의 아이들이 이젠 많이 컸다고 꼬물 짝 꼬물 짝 하는 예쁜 아기가 너무나 그립다. 그땐 육아하느냐고 힘들었다. 그러나 그 무한한 고됨을 이겨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기가 너무 예뻤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꼬물이들이 언제 커버렸는지 내 손을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앞으로 더더욱 나의 손을 떠나 생활하게 될 아이들을 상상하고 싶지 않은 건 나의 욕심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초등생이 된 아이들을 보며 셋째를 욕심부리는 건 무리수일까.
남편과 셋째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우리 집에 셋째가 있어서 거실을 기어 다니면 참 좋겠다고 서로 긍정의 신호를 보내며 동의했다. 듣고 있던 아이들도 엄마가 셋째를 하나 더 낳으면 되지 않냐며 우리의 대화의 흐름은 셋째의 얘기로 흘러갔다. 대화를 하며 사실 마음속으로 혹했다. '이참에 가져버려?'
셋째가 나올 경우 우리 집 재정의 흐름과 상황들. 모두 생각해 보기로 했다.
첫째. 셋째가 나오면 관사에서 쭉 살며 재정의 부담을 덜 수 있겠다. 관사에서 살면 아무래도 관리비며 가스 비등 일반 아파트보단 저렴한 편이라 재정의 부담을 줄여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둘째. 초등생 두 아이가 커갈수록 만만치 않게 들어가는 교육비를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셋째가 태어나고 버티고 버텨 3세 정도까지 키우다 다시 일선으로 돌아가야지 싶다.
셋째. 나이 많은 아빠의 정년은 정해져 있기에 셋째에게 들어가는 재정은..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가 사회생활을 하며 좀 보태주지 않을까. 기대를 걸어본다.
넷째. 체력이 달릴 것 같은 40대 엄마를 도와 초등생 두 자녀가 셋째를 키우는 일에 도움을 주지 않을까. 이것도 기대를 걸어본다.
다섯째. 그동안 배워보고 싶고 도전해보고 싶었던 배움을 내려놓아야 한다. 아이 셋은 육아에 헌신하라는 신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여섯째.................................................................................................................................
몇 가지만 생각해 보아도 참 불확실하고 불안해 보인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셋째를 갖는 일은 모험이고 또 다른 생이다. 지금과는 다른 풍경으로 우리 집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다 보니 아이를 갖는 일이 두려워졌다. 두 번째까지는 멋모르고 낳았는데 임신과 출산의 경험이 있다 보니 셋째부터는 불필요한 감정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지금의 생활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또다시 육아를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다지 달갑지 않다.
결론적으로 셋째를 가질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셋째를 갖기엔 나의 욕구가 크다는 걸 느꼈다. 엄마가 아닌 한 여성으로서의 나의 길을 조금씩 걸어보고 도전해 보고 싶은 것이다. 이젠 나도 이기적으로 살아갈 준비를 좀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초등생이 된 아이들은 아직도 부모 손이 많이 필요하다. 하지만 갈수록 내 손의 필요가 없어지고 있다.
그 의미는 나도 점차 아이들이 떠나갈 수 있도록 조금씩 놔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친구를 찾아서. 학업을 찾아서. 나의 길을 찾는 아이들을 건강하게 떠나보낼 수 있게 준비를 해두어야겠다. 사춘기가 찾아오고 준성인이 되면 서로 부담스러운 사이가 되지 말아야겠다. 부모가 아이를 나의 소유라고 생각해 휘두르거나 아이가 부모 눈치만을 살피는 그런 관계가 되지 않길 바란다.
내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나도 내 길을 걷고 아이들도 스스로 택한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쩌면 셋째를 갖는 일보다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일 수 도 있을 것이다.
셋째를 낳는 것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 나의 두 아이에게서 찾을 수 있다면 지금의 두 아이와 나를 선택하는 것도 괜찮은 결론이란 생각이 든다. 짧지만 심각하게 고민했던 상상 속 셋째를 생각하며 한순간 행복한 고민을 했었다. 비록 상상 속 셋째가 우리 가정에 태어나진 않았지만 상상만으로도 의미 있고 행복한 비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