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활탐험가 May 07. 2016

너는 아직 푸르다

카투니스트 김동범의 태국  스케치 여행


우리는 제대로 된 좋은 길을 찾아 헤이지만

그런 길은 처음부터 없었다

 

여행을 많이 다니면 나는 조금 더 빨리 철이 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여행의 날이 길면 길수록 더 많은 것을 얻을 거라고도 믿었었다.

그런 생각으로 떠남의 횟수를 늘리고, 여행의 기간을 늘려 나갔다.  

하지만 아니다. 아니었다. 여행이란 건, 삶이라는 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었다.  

단 한 번의 여행이 평생 살아갈 힘을 줄 수도 있는 것이고, 몇 번의 여행을 하고 나서도 빈손으로 돌아올 수도 있는 것이다.

답이란 게 있다면 쉽게 찾을 수도 있겠지만, 정답은 없으니 모든 걸 내려놓을 때서야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내려놓지 못해 아직 계속 헤매고 있나 보다.



 
처음엔 좀 그랬지만 사랑하게 되었어   


어쩐지 늘 긴장되는 입국 수속을 마치고 에어컨이 없는 공항 밖으로 나오자 추위에 익숙해져 있던 몸이 어쩔 줄 몰라 찌르르하다.

찐득한 열기가 훅 다가왔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어김없이 더운 공기가 태국에 온 것을 알려준다.

택시를 타기 위해 요금을 두고 택시 기사와 신경전을 벌이던 예전과는 달리 깔끔하게 시스템화 된 공항 택시(물론 가격이 좀 더 비싸다)를 잡아탄다.

여행을 할 때에는 택시를 가급적 이용하지 않지만, 저가항공을 이용하면 대개 버스도 지하철도 끊긴 밤늦은 시간에 방콕에 도착하기 때문에 택시 말고는 별다른 수가 없다.


“카오산 로드요”


짧게 목적지를 말하자, 택시 기사는 이미 내가 갈 곳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망설임 없이 출발한다.   

카오산 로드. 태국여행의 중심이자 배낭여행자들의 성지.

여행 좀 다녀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보거나 다녀왔을 장소이다.

처음 이 곳을 접했던 십여 년 전에 나는 정신없고 지저분하고 시끄럽고 매연도 심한 이곳이 싫었었다.

그때만 해도 나 역시 여행 초짜에 배낭여행자라기 보단 관광객이었고 여행의 의미를 모르던 때였으니 이곳의 여유로움과 무질서의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 카오산은 나에게 그저 카오스(Chaos). 즉 혼란 그 자체였었다.

하지만 이제는 복잡하고 시끄러운 카오산이 가장 편하고 느긋한 곳이 되었다.

현지인과 여행객이 조화를 이루고 저렴하게 의식주가 한 번에 해결되는 이곳이야 말로 배낭여행자들의 천국일지도 모른다.

반복되는 교통체증에도 이제는 고개가 끄덕여지고, 길거리에서 때우는 맛난 한 끼의 식사도 남부럽지 않다. 

카오산 로드를 오고 가는 사람들과의 멋쩍지만 다정한 눈인사가 이곳에 온 이유를 다시 깨우쳐 준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해서 짐을 풀자,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마음이 놓인다.

내일부터는 기다리던 하루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방콕의 밤은 짧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힘

   

태국을 여행할 때에 번화가에 나가면 어김없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기름진 검은 머리를 단정히 가르마 지고 단정하게 가르마를 내고 포마드를 바른 기름진 검은 머리, 검은 피부와 쌍꺼풀이 짙은 큰 눈, 깔끔히 면도를 했지만 얼굴을 뒤덮은 수염자국이 선명한 인도인들이 그들이다.

더운 날에도 희고 잘 다려진 와이셔츠에 정장 바지와 구두로 깔끔하게 차려 입고, 다양한 정장을 입은 사람들의 사진을 들고 호객을 한다.

관광객이 지나가면, 그들은 끊임없이 말을 걸고 웃으며 사진을 들이민다.


“헤이~프렌드, 멋진 옷이 필요하지 않아?”


특유의 인도 발음이 나를 붙잡는다.

어떻게 적지 않은 수의 인도인들은 이 멀리 타국에 와서 모두들 정장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을까?

물어보고 싶지만 그랬다간 어느새 내 손엔 정장이 쥐어져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이내 궁금증을 다시 걷어 들인다.

외국에 사는 외국인들은 내 생각보다 많았다.

식당과 게스트하우스를 하는 한국인들은 물론 금은방을 하는 중국인, 초밥 집을 하는 일본인, 여행사를 하는 프랑스인 등 다양한 나라에게 온 외국인들이 동남아시아에 정착해서 부지런히 삶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이처럼 사업을 하는 외국들도 있지만. 돈을 벌기 위해 적은 임금을 감내하며 일을 하러 오는 외국인들도 있다.

   

손님이 나간 테이블을 분주히 정리하고 있는 미얀마에서 온 그녀는 곱게 빗은 머리와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옷은 청결하고 깨끗했지만 오래된 옷에서 나오는 세월의 흔적까지는 세척할 순 없었다.

막 스물이나 되었을까 앳된 그녀의 얼굴에 *다나까를 하지 않았다면 미얀마인 이란 걸 알지 못했을 것이다.

몇 명 안 되는 손님들이 빠져나간 틈을 타서 그녀와 짧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밍글 라바~”


나는 미얀마 인사를 건넸다.


“밍글 라바~ 오늘은 손님이 별로 없네요.”


고국의 인사에 그녀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날도 있어야 조금 쉬어가겠죠.”


나는 대답했다.


“그렇긴 한데 너무 없으면 주인 눈치 때문에 더 힘들어져요.”


그녀는 말을 끝내면서 슬쩍 주인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살핀다.


“이곳까지 온지는 얼마나 되었어요?”


내가 던진 미얀마 인사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얼굴을 돌린다.

24살의 그녀는 삼 년 전에 태국으로 넘어왔단다.

미얀마 시골에 부모님과 동생들을 두고 살기 위해 그리고 가족들을 위해 이곳에 왔는데 생각보다 돈을 모으는 게 힘들단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하지만 한 달 수입은 우리나라 돈으로 이십만 원 남짓이다.

서글프지만, 별다른 사연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어렵고 힘든 일을 하는 외국인 근로자들도 모두 비슷한 상황이니까 말이다.

고등학교부터 몇 년간 공장에서 일한 나는 많은 외국인 근로자들과 함께 일했다.

조선족부터 방글라데시, 카자흐스탄, 필리핀 등 그들은 나라도 다르고 언어도 달랐지만, 목표와 꿈은 같았다. 고국에 있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쉬지 않고 일했다.


    “그래도 전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기뻐요.”


그녀는 마른 눈물이라도 나올까 금세 털어버리곤 테이블을 마저 닦는다.

그리곤 주인이 부르는 소리에 재빠르게 달려 가버렸다.

그녀가 닦은 테이블은 깨끗해졌다.


그녀 덕에 깨끗해진 건 테이블뿐만은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입어온 옷처럼

나는 나에게 맞춰져 버린 걸까.

   

이제는 다시 새 옷을 꺼내

입어야 할 때이다.





 




그때 우린 술도 마시지 않았어
 

도시생활을 접고 멀리 제주도로 내려간 만화가 형은 제주 밤바다가 보이는 시멘트 둑에 앉아 몇 달 만에 만난 나에게 말했다.

“넌 어떻게든 잘 살아가는 것 같아.”

파도가 둑을 때렸다.

검은 바다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형의 말처럼 난 잘 살아온 것 같다.

무엇이 잘 살아온 건지 답이 없기에 스스로 믿으면 그런 것 같기도 한 삶이다. 형에게 가슴 깊은 응어리를 꺼내 보여주고 싶었지만 나에 힘듦과 사정을 일일이 알아서 뭐하랴.

어차피 파도소리에 묻혀 그냥 바다로 흘러갈 텐데 말이다.

돌이켜 보면 할 수 있는 만큼만 열심히 살아온 것 같다.

그러다 힘에 부치면 조심스럽게 어색하지 않게 들키지 않게 물러나면 되었다.

잘 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인생이 가끔은 공허하기도 하지만 욕심 많아 괴로운 것보다는 훨씬 나은 삶이라고 다독인다.

그래서 딱 이만큼 살아가고 있다.


사람이 모이면 따뜻해진다  

   

추워도 너무 추웠다.

이상기온이라고 했다.

평년 기온보다 14도나 떨어졌다고 해도 영상 7도에 불과했지만, 난방의 개념이라곤 전혀 없는 열대 기후 나라에서, 게다가 변변한 겨울 옷가지 준비하지 못 한 여행자에게 있어 영상 7도는 발의 동상을 진지하게 걱정해야 할 정도로 추웠다.

태국 북부 도시 람빵에서의 3박 4일은 그렇게 내겐 춥기만 했다.

숙소의 샤워기에선 노란 물(아마 흙탕물) 그것도 찬 물만 나와서 제대로 씻을 수가 없었고, 건기에 등장한 때 아닌 폭우로 인해 추위는 더욱 거세져서 꼼짝없이 방 안에 바지 두 벌과 후드 티 하나와 얇은 패딩 하나를 겹쳐 입고 두꺼운 니트 양말을 신고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덜덜 떨어야 했다.

계획했던 4일째 아침이 되자마자 나는 미련 없이 배낭을 메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매표소 여직원은 무표정했다.

표정 없는 그녀가 건넨 치앙마이 행 기차 티켓의 출발 시간은 두 시간 후였다.

역 근처의 카페에 앉아 언 몸을 녹여보려 했던 내 기대와는 다르게 역 근처에는 카페 비슷한 것조차 없었다.

꼼짝없이 플랫폼에서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간이 담요를 꺼내서 둘둘 말고 의자에 앉았다.

기차 시간이 다가오자, 지금까지의 여정의 흐름상 아주 당연하게도 폭우가 쏟아졌다.  

그러자 갑자기 내 주변에 각각 따로 앉아 있던 몇 명의 태국인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비가 와서 저러는가 싶어서 별로 신경 안 썼다.

이미 추위의 강펀치로 너덜너덜해진 내 몸과 정신은 비를 맞으면서 기차를 타든 말든 이젠 아무 상관없다는 될 대로 돼라 심정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내 쪽을 자꾸 쳐다보며 뭔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배낭을 메고, 비를 맞으며 반대편 플랫폼으로 건너가려고 했다.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리던 태국 사람들이 깃발을 들고 기차를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는 철도원 아저씨를 급하게 불렀다.

그리곤 나를 손짓으로 가리키며 연신 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그 말을 들은 아저씨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더니 우산을 들고 와서 말도 없이 내게 건넸다.

손잡이가 어디론가 달아나버린 청 녹색의 헤진 우산이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안심이라는 듯이, 잘 되었다는 듯이 웃으면서 내게 우산을 얼른 쓰라는 뜻의 손짓을 했다.

나는 얼결에 우산을 받아 들었다.

우산을 준 아저씨는 폭우를 온몸으로 다 맞으며 플랫폼으로 뛰어가셨다.

얼른 쫓아가서 아저씨에게 우산을 씌어 주려 했는데, 아저씨는 내게 처마 밑에 들어가서 비를 피하고 있으라고 눈짓으로 말했다.

그래서 난 우산은 아저씨를 주고 처마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우산도 가지고 가라고 하면서 끝내 받지 않았다.

차마 아저씨를 장대비가 내리는 플랫폼에 두고 갈 수 없었던 나는 아저씨 말을 듣지 않고, 아저씨 옆에 우산을 들고 섰다.

내 어깨까지 오는 작은 키의 아저씨에게선 체온과 비가 만나서 따뜻한 온기가 모락모락 올라와서 하나도 춥지 않았다.

그렇게 나와 철도원 아저씨는 폭우가 쏟아지는 플랫폼에서 말없이 몇 분을 손잡이가 없는 우산 아래에 나란히 서서 기차가 역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여행 잔고

   

감정을 따로 보관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특히 좋은 감정은 말이죠.

어느 때고 좋은 감정들을 꺼낼 수만 있게 된다면

난 참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전에 꺼내볼 수 있는 좋은 감정을 많이 만들어 둬야 해요.

어때요? 언제든 좋은 감정을 꺼낼 수 있을 만큼 풍족하게 가지고 계신가요?



                                                                                        

    


    

어느 노랫말처럼

언제고 떨쳐 낼 수 없는 꿈이라면

쏟아지는 폭풍을 거슬러 달리자.

망설인다고 사라질 꿈이 아니라면 떠나자.

목적지는 정해졌고,

두 다리는 멀쩡하니까.




김동범  쓰고 찍고 그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