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여행의 이유」, 김영하
작가는 이 책을 쓰는데, 자신의 모든 여행의 경험이 필요했다고 했지만, 내가 이 책을 읽는데는 나의 모든 여행의 경험이 필요했다. 작가의 말 한문단 한문단에 나의 여행이 어떤 의미였는지, 나는 왜 여행을 하는지 곱씹느라 두줄로 된 책을 읽는 것만 같았다. 작가가 말하는 여행이 내 여행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내 여행에서는 그런 의미는 어땠을까. 나는 그런 것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읽은 책이었다.
우리에게 여행은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할까. 오늘도,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공항에서, 기차역에서, 버스터미널에서 여행을 떠난다. 누군가는 지금 이 시간 여행 중일 것이고 누군가는 여행에서 돌아와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여행이 있고 사람마다 여행을 떠나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작가가 자신의 여행을 돌아보며 쓴 여행의 이유를 읽으면서 나는 나의 여행을 떠올렸다. ‘나는 왜 여행을 하는가, 나는 왜 여행을 좋아하는가. 나에게 여행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여행’이 즐기고 노는 것에서 한걸음만 안으로 들어가면 마주하는 이런 질문은 사실 진부하다. ‘여행’을 소재로 쓴 수많은 책과 이야기 속에는 ‘여행’이 주는 이런 의미와 질문에 대해서 각자의 답을 설명한다. 나는 그런 글을 읽으며 그들처럼 여행을 하고 싶어 하고 그들이 겪은 여행의 느낌을 그대로 느껴보고 싶어 했다. 그들이 소개한 여행기처럼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나는 정작 내 여행의 의미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소설가 김영하는 쉽게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이야기를 소재로 소설을 쓰는 작가다. 그의 소설 속에서는 기억을 잃은 살인자가 자신의 딸을 살인자로부터 지켜내기 위하여 애쓰기도 하고, 망해가는 대한제국을 떠나 멕시코로 이민하여 떠도는 한인들의 삶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의 소설은 종종 열린 결말을 향해 있다. 우리의 여행이 그러하듯이. 이 책을 읽으며 그럼 작가에게 여행은 어떤 의미일까 하는 궁금함이 일었다. 그의 삶과 그의 소설이 여행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생각하니 그의 여행과 삶이 접히는 순간순간의 장면으로 그 의미가 더욱 명료하게 다가왔다.
호텔의 빳빳하게 다려진 하얀 시트와 말끔하게 정리된 호텔방이 일상을 떠나 삶을 한발 멀리서 되돌아볼 수 있게 하여 마침내는 삶을 리셋하는 기분을 갖게 하는(66쪽) 여행의 경험이 그의 소설 속에서는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풀어졌다. 풀리지 않는 삶의 난제들과 맞서기보다 가끔은 달아나기도 했던(67쪽) 그의 경험이 소설 속에서 궁금했던 상상력의 바탕이었다. 작가는 아마도 기억이 소거된 작은 호텔방의 순백색 시트 위에 누워 인생이 다시 시작되는 것과 같은 느낌과 보이지 않는 적과 맞설 에너지가 조금씩 다시 차오르는 기분(68쪽)으로 소설을 시작하고 삶을 다시 시작할 힘을 얻었을지 모르겠다.
그가 말하는 여행의 이유가 나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여행을 통해서 보고 느낀 것을 정리할 때면 나는 여행지의 랜드마크보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내 삶이 달라진 미약한 변화가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보고는 한다. 여행이 반드시 삶의 변화를 가져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을 떠나서 삶을 리셋하는 기분을 가졌던 그 시간을 통해 내 안에 불어온 신선한 바람을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여행의 이야기로 써 보고는 한다. 나의 여행이 대부분 가족여행이니 이것은 우리 가족의 이야기로 써진다. 이 여행이 우리 가족에게 어떤 의미를 남겼을까. 우리는 이 여행을 통하여 어떤 마음의 변화를 갖게 되었을까 하는. 집이라는 느슨하고 나태한 공간에서 벗어나 걷는 것, 먹는 것, 자는 것, 그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고 낯선 여행지에서는 가족 서로가 새롭게 느껴진다. 이 순간 느끼는 것을 함께 느끼고 이 순간 헤쳐나가야 할 난관을 네 식구 모두가 함께 마주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일상과는 다른 서로의 마음을 더 짙게 느끼고 서로의 의미를 더욱 공고히 한다. 우리는 가족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206쪽) 여행이 우리 가족을 더욱 단단하게 한 그 느낌과 생각이 나의 여행기, 우리 가족의 여행 이야기가 된다.
여행을 다녀온 후에는 주변 사람들이 묻는다. ‘여행 어땠어’
대부분의 답은 이렇다. ‘아, 거기 좋더라. 음식은 어땠고, 날씨는 어땠고, 풍경은 어땠어. 과연 어디 어디는 꼭 가봐야 할 곳이었어.’ 나의 여행이 성공적이었음을, 나의 여행이 특별한 경험이었음을 말함으로써 여행의 의미를 설명한다. 여행이 일상보다 즐거운 이유는 돈과 시간을 들여 마련한 여행이라는 경험을 최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것으로 여행을 꾸리기 때문이다. 그런 후일담이 정해져 있다면 여행에서는 비가 와서도 안되고 차를 놓쳐서도 안되며 계획과 벗어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맞닥뜨려서도 안된다. 그런데 어디 여행이 그러한가. 입국심사에서부터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고 일상이라면 겪지 않을 일들로 여행의 불운과 만나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그런 모든 일들에서 여행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 눈앞의 현실에 맞춰 고정관념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는(43쪽) 그런 경험. 그것을 통하여 우리의 여행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일상의 관념을 흔들어 놓는 작은 바람으로 불어오는 것이다.
그간 읽었던 이런저런 여행기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여행자가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을 어떻게 돌아보았는지를 쓴 것이었다면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는 여행자가 여행 계획을 짜고 여행의 일정을 통해 이런 이런 여행을 했다고 보여주는 것(외면적 목표)과 달리 여행자 자신도 잘 모르는 채 추구하는 것(내면적 목표)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하게 한다. '추구의 플롯'에 따라 잘 쓰인 이야기는 주인공이 외면적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간절히 원하던 것을 달성하도록 하고 그런 이야기가 읽는 이로 하여금 깊은 만족감을 준다고 했다.(21쪽) 우리가 여행을 하는 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누구나 저마다의 여행이 있고 저마다의 여행 이야기가 있듯이, 이 책은 읽으며 저마다의 여행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준다. 하나의 텍스트지만 저마다의 여행을 대입하여 각자의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고 서로 다른 느낌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 책은 그래서 더욱 흥미로웠다. 내 안의 여러 여행이 이 책 곳곳에서 흘러나와 섞이는 느낌. 각각의 여행이 저마다의 기억으로 칸칸이 나누어져 있다가 이 책이 만들어 놓은 큰 방에 모여들어 ‘여행이란 이런 것이야’, ‘여행이 삶에 주는 의미는 이런 것이지’ ‘그때 그 여행은 이러했잖아’하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종국에는 ‘내게 여행이란 이런 의미였구나’하는 의미를 부여하게 하는 책이었다.
흔히 말하듯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하고 여행은 인생을 닮아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여행을 왜 좋아하는가, 여행이 삶에 어떤 의미인가 하는 질문에는 쉽게 답하기 어렵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51쪽). 그런 순간순간이 여행인지 인생인지 모호해지는 그런 순간을 겪으면서 여행이 내게 삶을 성찰하는 찰나의 순간으로 다가올 때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여행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