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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챗쏭 Jul 21. 2019

그렇게 저는 30대 중반의 공무원 수험생이 되었습니다.



형, 왜 공무원이 되려고 하는 거예요?


대학 후배인 A를 만나러 간 것은, 2013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마침 학교 근처에 업무 차 볼 일이 있었고 일찌감치 업무를 마치고서 나는 A를 찾았다. 가끔 연락하던 A가 학교 도서관에 있을지 없을지 알지 못했지만, 만날 수 없더라도 그저 학교를 배회하며 시간을 보낼 작정이었다. 회사를 벗어나서 깊게 생각할 무언가가 있었다.


“ㅇㅇ아, 오랜만이야~ 나 학교에 왔는데, 학교에 있으면 잠깐 볼래?”


A는 회사를 다니다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했다. 내가 생각한 몇 가지 중 하나는 공무원 시험을 보는 것이어서 A로부터 조언을 좀 구해볼까 하는 마음이었다. A가 내 얘기를 듣고 나더니 물었다.


“형, 왜 공무원을 하려는 거예요? 그냥 편할 것 같아서? 아니면 안정적이라고 하니까?”


그러게, 나는 왜 공무원이 되려고 하는 걸까.




5년 후, 10년 후 나의 꿈



법대를 졸업한 나는 사법시험에 몇 차례 낙방을 하고서 뒤늦게 장교로 입대했다. 전역을 하고 나니 나이는 서른 하나. 결혼도 했고 아이가 있었다. 나를 받아주는 곳이면 어디든 취업을 해야 했다. 적성, 전공, 장래, 그런 것은 내게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들어간 곳이 포털의 자회사였던 광고회사였다. 온라인 광고를 운영하는 업무로 회사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광고 운영과 광고기획을 하다가 대기업 광고주를 상대하는 전략사업본부로 자리를 옮겼다. 수많은 제안서를 써대다가 지쳐서 경영기획 업무를 해보겠다고 손을 들었다. 그렇게 5년의 시간.


주어진 것에 충실하자는 마음을 굳게 먹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기로 다짐한 시간이었다. 야근은 밥 먹듯 했고 광고주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했다. ‘갑질’이라는 말 자체도 낯설 만큼 당연한 갑을의 관계 속에서 살았다. 세상에 많은 갑을이 있다지만 광고주와 광고회사의 그것은 전통적이었고 굳건했으며 당연했다. 회사에서 밤 11시가 넘어 퇴근을 하면 업무용 택시비를 지원해 줬는데, 한 달에 20만 원을 받은 적도 많았다. 회사에서 우리 집까지의 택시비는 보통 만원이었다.


문제는 야근이 아니었다. 나는 회사가 나의 5년 후, 10년 후의 비전을 보여준다면 더 열심히 일할 마음이 있었다. 그것은 회사가 내게 물었던 질문이다. 임원 면접에서 상무이사였던 사업본부장의 마지막 그 질문은 회사를 다녔던 내내 내 곁에 있었다.


“5년 후, 10년 후의 꿈은 무엇인지 말해 보세요.”


 2013년 초. 회사 전 직원이 해외 워크숍을 떠났다. 태국 라용의 바닷가에서 나는 대표이사와 단둘이 걸을 기회가 있었다. 5년 차. 함께 들어온 몇몇은 대우가 더 좋은 회사로 옮겼고 업종을 바꾼 사람도 있었다. 회사에서의 나의 시간은 더디 간다고 느꼈다.


“대표님, 제가 우리 회사에서 찾을 수 있는 비전은 무엇일까요? 5년 후, 10년 후 제가 회사와 함께 꿈꿀 수 있는 미래가 무엇일까요?”


나는 그날 대표이사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대표이사는 그런 얘기를 했다. 회사는 개인의 비전을 찾아줄 수 없다. ‘개인의 비전은 개인의 몫이다’라는.

그 사이 우리 회사는 유명 포털의 자회사에서 어느 그룹사로 인수 합병되었다. 합병 초기 전체 연봉이 일괄 상승됐지만 팀원들은 하나둘 회사를 떠났다. 회사 전체의 분위기가 둥글게 곡선을 그린 분위기였다가 일렬로 정렬되며 칸칸이 줄 맞추어 앉는 느낌이었다. 나는 영업팀의 기본급을 줄이고 인센티브 비율을 얼마로 늘리면 회사 이익이 더 창출될지 열심히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여전히 나의 비전은 찾지 못한 채로.


면접을 보러 다녔다. 회사를 옮긴 팀원들이 추천한 적도 있었고 헤드헌팅이라는 무시무시한 말로 연락이 오기도 했다. 그중에는 온라인 광고 대행사 중 가장 규모가 큰 회사가 있었다. 해외지사를 설립해서 적극적인 확장을 시도하는 회사였다. 꽤 인상된 연봉으로 직급도 한 단계 높여서 이직하는 조건이었다. ‘이직’이 내게 구체화되고 있었다.


이렇게 이직을 하고 돈을 조금 더 벌고 또 나은 조건이 생기면 또 이직을 하고. 그러다가 나의 쓰임새가 적어지면 나는 더 이상 이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몇 살까지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 한번 조건에 맛을 들이고 나니 이 일이 나한테 맞는지,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나의 비전은 무엇인지 하는 질문들은 묻혀갔다.


다니던 회사에 계속 다니거나 회사를 옮겨서 다니는 것은 가장 편한 선택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또 그때그때의 길은 생길 것이고 당장 다달이 들어오는 급여도 적지 않았다. 회사에서 인정을 못 받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의 상황이 잠시 슬럼프이거나 누구나 겪는 과정이라면 나는 지금 조금 더 참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나는 조금 더 열심히 살고 싶었다. 그간 하던 ‘열심히’와는 다른 의미로. ‘해야만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두 가지가 조금 적당히 섞인 일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의 일은 돈을 벌기 위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해야만 할 일’이었다. 내가 하는 일이 조금만 가슴을 뛰게 할 수 있다면. 최소한 내가 대학에서 전공하고 공부한 것들이 조금만 쓰일 수 있는 일이라면.






결국 나는 ‘이직’을 하기로 했다.



다니던 회사의 유사업종이 아닌 전혀 새로운 곳으로.


처음부터 다시 모든 것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5년 후, 10년 후의 나의 모습까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지만 나는 아이 둘의 가장이었고 맞벌이하는 아내에게 모든 것을 전가하며 뻔뻔할 수는 없었다. 가장 현실적인 답. 그것을 찾아야 했다.


“ㅇㅇ아, 공무원을 원래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어서 공무원이 되면 무슨 일을 하는지 조차 나는 잘 모르겠어. 그런데 회사를 다니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 내가 대학에서 배우고 공부한 것이 사회를 위해 쓰일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것. 일하는 것이야 회사를 다니든 공무원이 되든 똑같겠지. 그런데 내가 하는 일이 조금만 그런 의미가 있다면 좋겠어. 내가 배우고 공부한 지식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런 일을 하는 직업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로스쿨에 들어가서 변호사가 되거나 얼마 전 1차 시험에 합격했던 노무사를 하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애가 둘이나 있는데 다시 몇 년 공부하겠다고 하는 건 너무 염치없는 일이더라.


회사를 다니는 동안, 나는 늘 5년 후, 10년 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고민했던 것 같아. 밤늦게 야근하고 눈만 떠서 피곤에 절어 출근해서는 하루하루 생명을 소진하는 것처럼 살아갈 수는 없더라. 낭떠러지가 저만치서 딱 기다리고 있는데 거기를 향해서 하루하루 걸어가는 느낌. 어느 순간 낭떠러지가 나타나면 그냥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도 나는 아무런 대책이 없는 거야.


공무원이 된다고 해서 그런 것 모두가 해결되지는 않겠지. 회사를 다닐 때 느꼈던 고민을 다시 할 수도 있을 테고 달라질게 별로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적어도 오늘 내가 하는 일이 이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정도는 알고 일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공무원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거야. “



그렇게 나는 30대 중반의 ‘공무원 수험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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