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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챗쏭 Oct 27. 2019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낭만적인 달리기

나는 여행을 떠날 때 '러닝화와 운동복'을 챙겨 갑니다.


달리기를 하겠다 마음먹었을 때, 생각했던 ‘러너’로서의 나의 모습은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하면서 골인 지점에 도착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여행을 가서 여행지의 도심을 달리고 리조트 주변을 달리는 모습, 호텔 헬스클럽의 러닝머신을 뛰는 모습, 일종의 허세였지만 그렇게 달리기를 즐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멋진 곳을 배경으로 달리는 러너의 모습은 그 자체가 화보였다. 낯선 곳에서의 달리기는 생각만으로도 신선했다.     


그렇게 하려면 달리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했다. 늘 달리던 사람이라야 여행을 가서도 어렵지 않게 달리기를 즐길 수 있다. 평소에 달리지 않던 사람이 여행을 가서 일부러 달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2년 전 달리기를 시작한 이후 여름휴가 때였다. 8월 뜨거운 여름에 우리는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첫 여행이어서 나는 드디어 마음먹었던 ‘러너’의 흉내를 준비했다. 여행용 캐리어 한쪽에 러닝화를 따로 챙겨 넣고 달리기 운동복, 작은 허리 가방, 블루투스 이어폰을 준비했다. 제주도에서의 숙소 근처에 달릴만한 곳이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행지를 달리는 러너의 모습을 상상하느라 즐거웠다. 숙소에 도착하고서 지도를 살펴보니 인근에 작은 초등학교가 있었다. 잔디가 깔린 운동장은 트랙이 둘러졌다. 한 바퀴는 300미터가 채 되지 않았지만 20바퀴를 뛰고 나니 5km였다.


도착 한 다음 날의 아침, 식구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 나는 전날 봐 둔 학교 운동장에 가서 5km를 달렸다. 그곳에 머문 사흘 동안 나는 그렇게 아침에 달리기를 했는데 8월의 햇살에 얼굴은 새까맣게 그을렸다. 마치 전지훈련을 나온 선수 같았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 몇 달 되지 않았지만 9월 초 첫 10km 달리기 대회였던 뉴발런온을 앞둔 때여서 마음은 달리기의 열정으로 불타 올랐다.



그 해 가을, 우리 가족은 태국 끄라비로 여행을 갔다. 이때도 가방 한쪽에 러닝화와 운동복을 챙겨 넣었다. 드디어 꿈꾸던 ‘여행지에서 달리는 러너’가 될 수 있었다. 숙소는 끄라비의 아오낭 비치 앞이었고 아침저녁으로 길게 늘어진 해변을 뛰는 러너들이 있었다. 도착한 다음날 나는 이른 아침부터 운동화 끈을 매고 달리러 나갔다. 찰싹이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단단한 모래 해변을 달렸다가 포장된 도로를 달렸다가 바다를 보며 따라 뛰는, 그렇게 꿈꾸던 달리기를 드디어 실현하고 있었다. 저 편으로는 해가 뜨고 짠내 섞인 바람이 얼굴에 부딪혀 오는 느낌에 가슴은 벅차올랐다.


해변과 맞닿은 숲 속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런 곳에서 달릴 수 있다니. 달리는 그 자체가 너무 즐거웠다. 달리는 리듬과 고동치는 심장소리가 엔도르핀의 수치를 점차 높여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쪽에서 갑자기 ‘컹’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폰을 꽂고 있어서 뭔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차라리 못 들은 척하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본능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뛰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고개를 살짝 돌렸는데 저쪽에서 큰 개 열댓 마리가 나를 향해 뛰어오는 게 아닌가. 재어 본 것은 아니지만 순간적으로 커진 내 눈동자는 아마 주먹만 했을 것이다. 발이 땅에 닿는지도 모르게 뛰었다. 정말 방향도 가리지 않고 그곳을 벗어나려 뛰었다. 그렇게 뛰는데도 ‘컹, 컹’ 짖는 소리는 가까워졌다. 개 짖는 소리가 그렇게나 공포스러울 줄 몰랐다. 한두 마리가 옆으로 나를 앞질렀다. 한번씩 앞서가면서 나를 쳐다봤다. 마치 정찰하는 듯했다. 한번 눈을 마주치고는 뒤로 빠지고 또 다른 녀석이 내 옆을 앞섰다가 뒤로 빠지고. 얼마나 달렸는지 모르겠다. 큰길로 나와서 문 연 가게 앞으로 방향을 잡았다. 개 짖는 소리는 여전히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저 멀리서 차가 보이고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이고서야 개 짖는 소리는 멀어졌다. 아, 살았다. 여전히 가슴은 벌렁거리고 있었지만 발 디뎌지는 땅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살아있는 것이 틀림없구나 싶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아내에게 죽을 뻔했던 이 경험을 이야기했다. 만일 나를 향해 개가 달려들었다면 나는 열댓 마리의 개로부터 형체도 알아보지 못하게 물어뜯기지 않았을까. 말로 옮기면서도 너무나 공포스러운 상상이었다. 그 후론 길거리의 목줄 풀린 개만 봐도 움츠러들었다. 여행지의 길거리를 뛰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호되게 배웠다.     



그랬음에도 나는 여행을 갈 때면 여전히 달리기를 할 준비를 한다. 여행지에 도착하면서부터 내일 아침 어디를 뛰면 좋을지 생각한다. 개가 있나 없나를 반드시 살피면서.

     

작년 11월 경주에 회사 워크숍을 갔을 때는 전날 밤의 술자리를 이겨내고 다음날 아침 가을색 곱게 물든 보문호수를 달렸다. 지난 8월 일산에 3박 4일 연수를 가서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한 바퀴에 4.8km쯤 되는 호수공원을 매일 2~3바퀴 달렸다. 올여름은 부산 해운대로 휴가를 다녀왔는데 동백섬을 한 바퀴 돌아 해운대를 달리는 환상적인 러닝코스에 빠져들어 머무는 내내 아침마다 8km를 달리고는 했다. 작년 가을 친구와 오사카 여행을 갔을 때, 주말에 오사카성을 달리는 수많은 일본의 러너들을 보면서 다음에 오면 꼭 이렇게 달려보겠노라고 마음먹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여행 와서 달리기를 좋아하는 것이 나의 독특한 취향 혹은 허세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김연수 작가의 책 ‘언젠가, 아마도’를 읽다가 나는 무릎을 탁 쳤다. 나랑 비슷한 사람이 또 있구나.


옮겨보자면 이렇다.     

“지난여름, 일본 미나미아소에서 아소산을 바라보면서 달린 길은 너무나 평화로워서 인상적이었다. 누군가 내 모습을 찍었다면, 그대로 <러너스 월드>에 보내도 좋을 만큼 풍경이 아름다웠다.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샌프란시스코만을 바라보면서 달린 일도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때 이어폰에서 리 오스카의 ‘San Francisco Bay’가 흘러나왔는데, 그 순간 나는 그 노래를 완전히 이해했다.”

(언젠가 아마도, 김연수, 209쪽)     


여행을 와서 좋아하는 달리기를 하는 것은 여행을 더욱 생동감 있게 만드는 일이다. 여행의 추억거리가 하나 더 생길 수도 있다.(물론, 개에 물어뜯기지만 않는다면)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고 누구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자아도취의 방편이다. 김연수 작가의 글에서처럼 여행지에서의 달리기는 ‘세상에서 가장 사치로운 달리기’이자 가장 낭만적인 달리기임이 틀림없다. 한번 더 말하지만 개에게 쫓기는 일만 생기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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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Chander 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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