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 없이 여름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이디스 워튼의 ‘여름’은 여름마다 추천되는 고전 문학이다. ‘여름’에 수놓아진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자동적으로 그려지는 여름 풍경과 휘몰아치는 감정 묘사 때문에 책을 집어 들 때마다 시공간을 초월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름’은 문학계에서는 젊은 여성의 성적 열정을 전면에 내세운 최초의 여성 성장 소설로 평가하고 있더군. 나에게도 ‘여름’은 시대적 배경으로 인한 장치가 낡게 느껴지기보다는 정체감이 약하고 상처가 많은 방어적 여성이 처음으로 ‘사랑’을 만나 내면에 이는 혼란과 변화, 성장의 과정을 담은 소설이었다.
채리티가 처음 하니를 만나면서 느낀 생경한 감각과 작은 균열은 결국 채리티의 세계를 통째로 갈아치워 버린다. 우리에게도 미숙한 때에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찾아온 사랑이 한번 쯤은 있지 않던가. 그리고 그 사랑은 어김없이 나를 큰 혼란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그 경험들이 나를 모두 통과해 간 어느 날에는 겉모습도 어딘가 좀 낯설어 진것도 같고, 속마음은 더더욱이 전과 전혀 다른 내가 되어 있는걸 발견하게 된다.
‘여름’을 읽으면서 채리티가 겪은 마음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촥 달라붙어 목격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감정의 묘사, 계절과 풍경의 묘사가 이 소설의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5분만 걸어도 정신이 휘청일 것 같은 쨍한 여름에 여기가 꿈인지 현실인지 몽롱하게 만들어 줄 만큼 쨍한 ‘여름’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 이열치열. 누가이기나 한번 가보자고.
채리티는 지금껏 적응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다만 부러지고 찢기고 파괴될 따름이었다. 203p
▫채리티는 신분도 학력도 낮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에게 버림받아, 시골 변호가 로열씨의 집에서 성장한 채리티는 성장하는 내내 동네 주민들로부터 ‘널 거둬 준 로열씨에게 감사해야 해’ 같은 말을 귀에 피 딱지가 나도록 듣는다. 태어나자마자 생모에게 버림받은 채리티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쉽게 믿어버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근본이 흔들리는 상황에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을 느낀다. 채리티에게는 삶 자체가 매 순간 타인의 거절과 평가절하를 예상/확신하는 마음 순환의 반복이었을 것이며, 이는 채리티를 더욱 방어적이고 냉소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루시어스 하니가 처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할 말을 잊고 얼굴을 붉히며 책상 가장자리에 기대고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깨달았다. 60p
▫모든 동네 주민이 채리티의 사연을 아는 시골 동네에 한평생을 살던 채리티에게 낯선 도시에서 온 신비로운 느낌의 남성이 편견 없이 주는 것 같은 관심은 채리티의 심장을 뛰게 만들기 필요충분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누구나 존재적 긍정에 목말라하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봐주는 사람. 그게 괜찮다고 해 주는 사람. 채리티는 낯선 남성의 젊음에도 동요했지만, 처음 느껴보는 이 감각에 마음을 홀리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수치심과 자존심 때문에 차마 그러지 못했다. ‘이 사람은 내가 속해있는 사람들이 어떤 이들인지 아는 게 좋아.’ 채리티는 다소 억지로 도전적인 태도를 취하며 혼자 생각했다. 실제로는 수치심 때문에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76p
▫️거절당할 것 같을 때, 먼저 방어적으로 튕겨내거나 공격적인 말투로 선을 긋게 된다. 채리티도 그러했다. 상처받을 것이 예상되는 마음의 회로가 작동을 시작했고, 왜인지 이번 상처는 보통 때보다 더 아플 것 같았을 거다. 그래서 ‘내가 이래도 괜찮겠니?’가 아니라, ‘이런 나니까, 어차피 너도 날 떠날 거지?’처럼 말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공격적 자기 보호는 사실은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방어일 수 있다.
늘 사랑이란 혼란스럽고 비밀스러운 무엇이라고 생각해 온 채리티에게 하니는 사랑을 여름 공기처럼 밝고 싱그러운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165-166p
▫채리티는 하니를 사랑하면서 사랑에 대한 관념이 변화되었다(채리티에 대한 하니의 마음이 얼마만큼의 진심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경험(체험)’을 통해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자신의 보잘것없는 세계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로열 씨도 그녀에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그를 증오하는 것조차 그만두었다. 169p
▫사랑이 채리티를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중•••
“잠시 이곳을 떠나 있어야겠어…. 어쩌면 한 달이나 두 달 정도….. 일을 정리하려고. 그러고 나서 다시 돌아올게….. 그러면 결혼하자.” 하니의 목소리는 마치 낯선 사람처럼 들렸다. 그 목소리에는 채리티가 아는 떨림이 남아 있지 않았다. 193p
▫우리의 직감은 언제나 우리의 생각보다 빠르다.
한동안 채리티는 고통의 큰 파도에 휩싸여 나뒹굴며 그 공격에 맞서는 맹목적인 투쟁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의식할 수 없었다. 211p
▫사랑의 끝을 직면하게 된 순간. 성장은 언제나 고통을 수반한다. 채리티는 다음 단계로의 진입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