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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린 Aug 04. 2023

적응한 존재가 가장 강한 것이다 | 스페인 란사로테

화산섬의 포도나무 이야기

란사로테, 아프리카 대륙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적도 근처에 위치한 화산섬. 일년 내내 바람이 불어 한여름인 지금도 아침저녁으론 의외로 시원하다. 이 곳의 로컬 와인을 마시는데 희안하게 생명력이 느껴진다. 유명세도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왜 그럴까?


1730년 9월 1일, 섬의 1/3을 덮어버리는 강력한 화산이 터진다. 6년간 계속된 화산 폭발이 끝나자, 용암이 식고 화산재가 남는다. 섬 사람들은 이를 pícon이라고 부른다.


이 화산재가 요물이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바닷바람에서 습기를 포착할 수 있고, 습기를 머금으면 6시간 동안 유지한단다. 이곳은 일년 중 단 3개월 정도만 비가 오는데, 포도나무에 물을 따로 주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여기 수돗물은 바닷물에서 소금을 뺀 (desaltify) 것이라 미네랄이 없기도 하지만, 그 마저도 부러 주지는 않는다고 한다.


바람.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처음 맞아주는 것도 바람이다. 애플 워치에서는 이곳의 바람소리가 90dB 이상이라고 자주 수선을 피운다. 이 소음 환경에 30분 이상 노출되면 청력에 이상이 생긴다고 한다. 바람 소리로 청력에 문제 생긴단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바람이 이렇게나 강하다. 몇몇 해변가는, 가만히 서 있으면 미세한 모래가 강한 바람을 타고 몸을 사정없이 때린다. 선풍기에 모래를 끊임없이 달아서 대차게 때려대는 느낌이다. 그 날 저녁 화장을 지우는데, 화장솜에 까만 흙이 잔뜩 묻어나오고 슥슥 모래 긁는 소리가 날 정도였으니 세긴 세다.


부족한 비와 강한 바람, 그래서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땅.

그러나 매년 수십 만 병의 와인을 생산해내는 섬. 듣고도 믿기지 않는 이 조합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용암이 식고 뜨거운 기체가 다 날아간 뒤, 구멍이 움푹 패였다고 한다.

1755년, 엘 그리포의 창업자는 그 움푹 패인 곳에 포도나무를 심고, 바람을 가려주기 위해 흙을 돋아 준 뒤 현무암을 초승달 모양(crescent wall)으로 쌓아 담을 만든다. 이렇게 세상에 없는 독특한 방법으로 심은 포도나무는 대찬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비가 오지 않아도 화산재에 머무는 습기를 빨아들여 자라나게 되고, 구멍 구멍이 모여 큰 와이너리를 형성하게 된다. 바로, 스페인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와이너리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 독특한 지형은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Unesco World Network of Biosphere Reserves) 지정되기도 한다.




쉽게 감동하는 성향은 아니다. 어릴 때 호기심이 많았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한다. 지금은 많은 일에 무뎌졌다. 어차피 감동은 멀리 있으니, 이번 여름 휴가도 열정적으로 계획하지 않았다. 기준은 단 하나, 저렴하게 지낼 수 있는 곳. 파리에서 란사로테까지는 비행기 값도 저렴하고 (테네리페 행 대비 1/3 가격), 숙소도 프랑스 대비해서 절반 가격이다. 먹는 것도 프랑스보다 40% 정도 저렴하다. 큰 아들이 갈리시안 문어 요리를 거의 매일 먹고, 어떤 날은 3접시까지 먹는다. 파리 같았으면 두 접시부터는 용납하지 않는다. 맛 잘 봤지? 집에 가서 다른 거 더 해줄께 라고 얘기를 했을 것이다. 여기서는 세 접시 다 주문한다. 그래도 총 금액은 파리에서 외식하는 비용의 절반 수준. 먹자, 먹어라.



기대가 없다시피 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이곳 사람들이 살아온 방식은 지구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어서 그럴까. 이 섬의 많은 부분들이 좋다.


바람에 이파리는 마구 흔들리는데, 뿌리는 뽑히지 않는 포도 나무를 바라보는데, 기특했다. 나도 너처럼 척박한 환경에서 뿌리 박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애쓰는 포도 나무를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버틴다고 말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너는 참 대견하다.

살짝, 감동이 찾아왔다. 포도 나무를 살리기 위해 궁리한 사람들도 있고, 흙을 돋고 담을 쌓은 사람도 있다. 비료를 주는 사람도 있고, 뿌리를 단단히 고정시킨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모든 노력을 알아주기라도 하듯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다.


이곳의 재배 방식은 기계를 써서 수확을 할 수도 없다. 일렬로 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일이 사람이 손으로 따야 한다. 심는 것부터 가지치기, 수확까지 흔한 방식은 하나도 없다. 일정 정도의 고통을 수반하는 방법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포도나무는 의미있는 성장을 이뤄낸다. 생각만 해도 힘이 들고 피곤할 것 같다.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 결국 많은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져 주고 있다.  

사람도 그렇다고 한다. 뇌는 쾌락 만큼이나 고통을 환대하며, 사람의 본성은 안락한 감각만큼이나 의미있는 성장을 추구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와인이 살아있는 것 같은 맛이 난다. 어떻게든 적응하고 살아남으려 한 에너지가 남아있는 것은 기분 탓일까. 아니면, 에너지라는 녀석은 이렇게 끈질기게 맴돌아서 기어코 마시는 사람의 혀까지 닿는 것일까.

어느 도시 침침한 재즈바에서 이 와인을 마셨어도 뭔가 다르다고 느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아닐 것 같다. 덜 느꼈거나 못 느꼈을 것이다.


이성이란 희한한 존재다. 무엇을 보더라도 온갖 열정을 갖고 바라보면 천지를 뒤흔들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게 다가지만, 열정 없이 바라보면 하찮게 다가온다.

- 키에르케고르 <이것이냐 저것이냐>



어려운 환경에 포도 나무도 적응하고, 사람도 적응했다. 생명력을 유지하고 더 강력히 꽃피웠으니, 강한 존재들이다. 알고나니, 다르게 보인다. 설교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존재는 늘 강력하다.


실은, 란사로테 섬 동쪽에 팔마 섬의 화산이 얼마 전에 터졌다고 해서 무서웠다. 어쩌면, 머무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내가 위치한 곳에도 화산은 터질 수 있다. 하지만 그 걱정은 근거가 없었고, 이미 숙소와 비행기 비용은 환불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찜찜하게 도착했는데, 죽을 까봐 걱정했던 그 컴컴한 마음에 생명력의 기운이 들어왔다.

그것도 와인을 마시다가 말이다. 꽤, 괜찮은 발견이다.


란사로테의 화산재, 피콘
초승달 벽을 쌓은 와이너리
자세히 보면 용암이 내려앉은 구멍에 심어진 포도나무의 줄기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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