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세

by 해린

14살 큰 아들이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는 무리가 있다. 스페인, 프랑스, 아르헨티나, 러시아, 영국 등 다국적으로 이루어진 이 무리는 운동도 같이 하고, 게임도 같이 하고, 부모들도 친하게 지내서 우리는 돌아가면서 다 같이 모여 파티를 자주 한다. 하루는 앙투안(프랑스 아빠-터키 엄마)네 집에서 홈파티가 열려 우리 모두 몰려갔었다. 앙투안 엄마는 바쁜 와중에 파티도 자주 열고, 갈 때 마다 뚝딱뚝딱 맛있는 터키 음식도 잔뜩 해줘서 좋은데, 위트까지 있는 친구다. 그녀가 아이들에게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을 챙겨주는데, "가장 어린 사람부터 떠줄께, 누구니?" 라고 물었다. 어린 동생들부터 신나게 한 두 주걱씩 받아갔다. 그 다음, 큰 아들 무리 차례가 되었고, 나의 큰 아들이 무리에서 가장 생일이 빨라 아이스크림을 받아갔다.


그런데, 아들이 받아가면서 한 마디 했다.

"가장 어리지만, 가장 키가 크죠."


순간, 유교사상에 절여진 나의 숨겨진 자아가 불쑥 튀어나왔다.

"아들, 겸손해라." 라고 말해서, 분위기를 냉랭하게 마무리했다.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이건 겸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까지 말이다. 그냥 그렇다고 웃어넘기면 되는데, 괜히 겸손하라는 둥 쓸데없는 사족을 붙여 다른 친구들이 '내가 나이도 많은데, 키도 작은 건가?'라는 생각을 하게 했을 수도 있다. 어차피 눈에 다 보이는 것이고, 아이들은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키가 크는데, 거기서 겸손 같은 단어가 왜 나왔을까.


어쩌면, 키가 커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내가 은연중에 했던 것은 아닐까. 유럽 한복판에 사는 동양인으로, 그나마 키라도 커서 덜 무시받는다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런 말을 듣게 되었을 때, 괜히 찔려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후자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괜히, 아들의 기세를 꺾는 우를 범한 것 같다. 언젠가는 엄마가 그때 잘못 반응했다고 꼭 얘기해주고 싶다.



고국을 떠나서 산다는 일은, 쉽지 않다.

나와 친한 동네 유럽 친구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고 내가 참 사랑하지만, 그들은 서태지를 모른다. 시크릿 가든의 현빈이나 배반의 장미의 엄정화도 모른다. 한 번은 다같이 내 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한국 노래를 틀어보라고 해서 90년대 (내가 중고등학교 때 듣던) 가요를 틀어줬다.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더 정확히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하긴, 나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 전 유럽의 노래를 틀어놓으면, 절로 이방인이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현재를 열심히 공유하지만, 가끔은 문화적, 역사적 차이가 드러날 때 나는 (보통의 기준을 가진 나와 같은) 한국인이 왜 이러한 생각을 갖고 행동을 하는지 설명해야 하는데, 이는 늘상 재미가 없는 지루한 배경 설명으로 귀결된다. 얼마나 전달이 되었을지도 확신이 없다.


2025년 가을 지금은, 한국의 위상이 말 그대로 급상승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관심도 가져주고, 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궁금해하기도 한다. 한국에 여행이라도 가게 된다면, 무얼 사고 무얼 먹고 무얼 봐야 하는지 물어보고, 다녀와서 어땠는지 이야기하면서 다들 너무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BTS, 블랙핑크, 기생충 등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거나 관심이 없으면, 한국은 중국보다 더 서쪽에 있는 그저 먼나라일 뿐이었다. 그러니, 이방인이 아닌 하나의 온전한 '사람'으로 타지에서 살아가려면, 고국에 살 때 보다 조금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었다.


노력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지친다. 다 의미없는 것 같고, 그냥 한국어로 마구 아무말이나 떠들어도 모두가 알아듣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도 있다. 노력과 다짐만으로는 지속가능하지가 않다. 그래서 '기세'를 가져야 한다. 상점에서 물건을 환불하거나, 무언가 당연한 것을 요청하거나,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도 역시 기세는 유효하다. 나에겐 제 2외국어인 영어로 강의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약간의 문법적 오류가 있어도 내용이 더 중요하고, 자신감있게 열정을 담아 전달하려는 기세가 중요하다.


영국 소설가가 말했듯, 인생은 좋은 카드가 있다고 항상 이기는 게임이 아니다. 나쁜 카드를 들고도 어떻게 게임을 잘 풀어나가느냐에 성공 공식이 있다. 그러니, 생각을 전환하고, 작은 태도부터 좋은 에너지를 담는 기세가 필요하다. 우습지만, 기세가 한 번 오르면 괜히 더 당당하게, 긍정적이면서 즐겁게,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