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과장 이야기
“박과장님, 직원평가지표 개발 워크숍 자료를 준비중인데요… 작년에 박과장님이 정리한게 있는데, 이번에 박과장님이 새롭게 다듬어 주시면 어떨까요?”
회의가 끝나갈 즈음, 최과장이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부탁이라고 하긴 애매하지만, 거절하자니 조직 분위기가 어색해질 수 있는 미묘한 어투였다.
박과장은 짧은 정적 끝에 “네, 알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어쩌면 그 순간, 박과장은 이미 그 일이 자신의 몫이 되리라는 걸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 업무는 작년에도 최과장이 부탁해서 정리한 일이었다. 직원평가 지표의 기획 의도, 항목별 기준, 배포용 안내서 초안까지 모두 인사관리 업무를 담당하는 최과장의 몫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최과장이 “요즘 워크숍 관련해서 박과장님 감각이 더 잘 맞는 것 같아서요”라는 말을 덧붙이며 자연스럽게 물러섰다.
문제는 그 부탁 이후의 모습이었다.
정시에 칼같이 퇴근하는 최과장의 뒷모습을 보며, 박과장은 모니터를 다시 켰다. 이메일 첨부파일로만 남아 있는 옛 자료들을 찾아 정리하고, 변경된 정책 내용을 반영해 문구를 다듬고, 현실과 맞지 않는 항목은 새로 재구성했다. 어느새 사무실엔 그 혼자뿐이었다.
그는 책상에 고개를 떨군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정말 내 일이 맞긴 한가?’
하지만 이내 마음속에 다른 소리가 따라왔다.
‘그래도 이걸 잘 해내면, 나도 조직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 거야.’
그 말은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한 주문 같았지만, 동시에 진심이었다. 박과장은 늘 묵묵히 일했고, 가끔은 누군가의 빈자리를 메우며 조직의 틈을 채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걸 누군가는 보고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다음 날 아침, 최과장은 환한 얼굴로 “자료 준비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과장님 아니었으면 이번에도 진짜 힘들 뻔했어요”라며 웃었다.
박과장도 웃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엔 질문이 맴돌았다.
“그 일, 원래 누구 몫이었지?”
일은 단순히 분장표 위에 적힌 게 전부가 아니다.
책임이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넘기지 않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결국, 그 일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그 사람을 말해주는 법이다.
오늘도 박과장은 그렇게, 조용히 한 조각의 배움을 품고 하루를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