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12일 목요일 갑진년 계유월 기묘일 음력 8월 10일
중학생 때의 나에게 좋아하는 책을 물어본다면, 아마 난 고민하지 않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답할 것이다. 원래는 그의 소설에 나오는 가상의 책이었는데 나중에 같은 이름의 책을 출간한 거라나. 찾아보니 내용을 보강한 판본을 꾸준히 출간하고 있다는데, 내가 읽었던 건 1996년의 책이었더라. 그 뒤로도 이것저것 추가된 모양이지만 거기까지 읽어보진 않았다.
당시의 나는 책 읽는 걸 썩 좋아하지 않았을 때지만, 그럼에도 그 책은 좋아했다.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다양한 잡지식을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난 그렇게 잡지식을 모으는 것을 좋아했다. 언젠가의 나는 TMI를 모으는 것도 뿌리는 것도 좋아하는 TMI 컬렉터라고 주장한 적 있었다. 요즘은 뿌리는 양은 줄었지만 (그래도 내뱉을 건 다 내뱉고 산다는 모양이다) 모으는 것에 대한 선호는 여전하다. 때로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당사자를 걱정하기보다는 사건의 전말을 알고 싶어 한다. 공감적 말하기를 시도하여 "무슨 일이야ㅠㅠ" 하며 그 상황에 대한 썰을 풀어주길 바란다고 하면 너무 소시오패스 같은가.
하여간 그런 걸 좋아하는 만큼 머릿속에는 이것저것 많이 들어있을 것만 같은데... 막상 필요할 때가 되면 잘 꺼내지지 않는다. 쿼리 할 수 없는 데이터가 무슨 소용이람. 방에 있는 잡동사니뿐만 아니라 머릿속에 있는 잡지식들도 차곡차곡 정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방에 있는 잡동사니가 차곡차곡 잘 정리되어 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긴 하다. 아무래도 나는 깔끔함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위생관념이 지나치게 떨어지지 않게만 조심해야지(?).
쿼리 되지 않던 잡지식들은 마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어느 순간 의식의 영향으로 내리 꽂히곤 한다. 어 잠깐, 하면서 그 잡지식을 활용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때로는 이거 이렇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이를 내뱉으면 "님 천재세요? 근데 다 좋은데 그걸 왜 이제 얘기해요(...)?" 하는 소리를 듣곤 한다. 그치만 내가 그것을 떠올렸을 땐 대체로 상대가 그것과 관련해 열심히 삽질을 하고 난 이후였다.
잡지식이 적절한 타이밍에 유용하게 쓰인 적이 없진 않다. 최근의 이야기를 하자면 TXT 형식의 텍스트 파일을 SRT로 바꾸고자 할 때, 그리고 SRT 파일이 파싱 되지 않는다는 오류를 만났다고 할 때 발휘된 지식이 있다. SRT 파일은 텍스트 기반의 자막 시스템이다. 이게 자막 파일임을 알려주기 위해 이름을 SRT라고 부를 뿐이지 내부적으로는 TXT 파일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경우에는 따로 변환기를 돌리지 않고 확장자만 TXT에서 SRT로 바꿔 줌으로써 쉽게 확장자를 변경할 수 있다. 어차피 내부적으로는 똑같으니까. 그래서 그 내부가 어떻게 생겼느냐. 첫 줄에 몇 번째 자막인지 1부터 시작하는 숫자가 있고, 그다음 줄에 언제 뜨는 자막인지 타임스탬프가 있으며, 마지막 줄에 자막 텍스트 본문이 있는 세 줄짜리가 한 줄 개행을 간격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이 양식을 벗어나는 텍스트 파일에 대해서는 파일을 제대로 파싱 할 수 없다는 오류가 뜬다. 참고로 문제의 파일에는 자막 순번 숫자가 빠져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지식을 잘 뽑아낼 수만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는 지식을 활용하지 못해서 헤매다가 다 지난 뒤 나중에 문득 떠올라서는 왜 그땐 떠올리지 못했을까, 하는 일이 종종 있다. 데이터베이스 쿼리 따위를 배울 게 아니라 내 머릿속 쿼리나 배웠어야 하는데. 사실 컴퓨터보다는 인간에게 더 관심이 많은데 정작 인간에 대해 배워 볼 기회는 딱히 없었던 것 같다. 물론 그 분야에 그다지 재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취미 정도로는 공부해 봐도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또 어느 분야의 잡지식을 늘려 가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