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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휘 Sep 13. 2024

#11 상황 파악

2024년 9월 13일 금요일 갑진년 계유월 경진일 음력 8월 11일

분명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닌 것 같은데 유독 상황 파악을 하는 데에는 오래 걸리는 편이다. 상황을 어느 정도 인지했다고 느꼈을 때에는 이미 시의성을 잃은 경우도 많고. 누군가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설명해 주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그러한 상황 파악의 지연이 집중력 저하와 겹치는 일도 있는데, 그러면 나만 모르는 무언가가 형성되곤 한다. 다 같이 이야기를 들었는데 내가 그 이야기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해 이야기를 일부 놓치면서, 원래라면 명확했을 이야기가 나에게만은 구멍 투성이의 이야기로 들어오는 것이다. 남들에게는 유추할 것도 없는 내용에 대해 나는 그 빈 구멍들을 유추하며 열심히 상황 파악을 하려고 애쓴다. 가끔은 내가 놓친 구멍에 대해 물어보기도 하지만, 상대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음을 티 내는 것이다 보니 조심스러울 때가 많다. 하여간 가뜩이나 상황 파악을 잘 못 하는데 구멍 투성이인 이야기를 기반으로 상황을 파악하려고 하니 모두가 들었지만 나만 잘 모르는 무언가가 형성되기도 한다.


5월의 어느 날, 도저히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채 그저 마주 보고 서 있던 순간을 떠올려 본다. 두 사람의 대화였지만 당사자 중 하나인 나는 그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두 사람의 대화가 아니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던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그러고 있었으니, 그건 혼자 쏟아내는 말들이었을 뿐이다. 그날의 기억은 한참이나 내 안에 남아 여러 번 반추함으로써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역시 그날의 내가 어떻게 반응했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럴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 그리 말하는 아야나미 레이처럼.


사실 애초에 내 삶 자체를 이해하고 사는 것 같지가 않다. 삶은 늘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다. 『공포』의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실린이 느끼는 감정이 이런 걸까 싶을 정도로 그 이해할 수 없음에 매몰되어 불안과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그 정도까지의 극심한 공포를 느낀 적은 없는 것 같다. 여러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정말 여러 의미로 나아지고 있구나. 새삼 내 곁에 있어주는 이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언젠가 지원사업과 별개로 유의미한 친구로 남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쓰다가 생각해 보니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닌 것 같은데'라는 말에도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10명 정도 되는 인원 속에서 비밀 연애도 아니었던 사내 커플의 존재를 몇 개월 동안이나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녀석이 과연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닌' 게 맞는 것일까. 어쩌면 나는 그냥 눈치가 없는 녀석이었던 것 아닐까. 섬세한 인간 감정 같은 걸 항상 어려워하는 걸 생각하면 눈치가 빠르기 쉽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눈치가 없는 녀석이라고 가정하면 앞뒤가 맞아떨어지긴 한다. 남들이 눈치껏 알아듣는 부분에서 눈치껏 알아듣지 못해서 혼자 못 알아듣고 상황 파악을 못 한다거나. 얘기하고 보니 맞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은 문장이 어느 정도 이상해도 문장의 구성요소를 쫓아 읽다 보면 그게 비문이라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읽어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난 그런 부분에서 '이게 무슨 말이지' 하며 다시 읽어보다가 비문임을 눈치채곤 한다. 교정교열에는 도움이 되어 편집자로서는 괜찮은 특성이지만 일상에서는 썩 좋지 않게 작용하는 경우도 있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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