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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과일청

2024년 1월 17일 금요일 갑진년 정축월 병술일 음력 12월 18일

by 단휘

냉장고에 과일청이 들어 있어도 전혀 건드리지 않는 녀석이었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사실 지금도 냉장고에 있는 대부분의 과일청을 건드리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 녀석이 유독 레몬청만 몇 병을 비운 것은 아무래도 미정이의 영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작년에 미정이가 챙겨다 준 레몬청이 내가 과일청에 손을 대기 시작한 계기였으니까. 정확히는 그 이후의 레몬청들도 결국 미정이네 레몬청이잖아?


그렇게 과일청에 어느 정도 맛 들렸을 때 몇 년 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이 소개해준 동네 카페도 공교롭게도 수제 과일청을 취급하는, 커피보다는 차를 마시러 가는 곳이었다. 그 이후에 다른 친구가 우리 동네에 놀러 왔을 때 한 번 데려가려 했는데 문이 닫혀 있어서 함께 가지 못했던 건 아쉬운 일이지만 말이다. 맛도 분위기도 전체적으로 괜찮았던 것 같은데. 언젠가 4인 이하 규모로 이 동네에서 사람들 만날 일 있으면 그때 다시 가보면 좋을 것 같다.


그건 그거고, 냉장고에 있는 서너 가지의 과일청은 대체로 방치되어 있다. 누가 챙겨줘서 받아왔다는 모양인데, 나의 가족은 나보고 "너 청 잘 먹잖아"라며 떠넘기는 것 같다. 그렇게 백향과청이라던가 딸기청과 같은 이것저것을 챙겨 먹으라는데 글쎄. 백향과청까지는 그렇다 쳐도 나머지는 그다지 흥미가 가지 않는다. 저걸 또 너무 오래 놔둬도 좋을 게 없을 텐데. 뭐, 책임은 가져온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걸 요구한 사람이 있었다면 요구한 사람에게 책임이 있겠지만, 누가 준다고 했을 때 '가족이 잘 먹는 것 같던데'라고 본인이 판단해서 가져온 거라면, 오판에 대한 책임은 본인에게 있는 거지.


레몬청을 다 먹은 입장에서 백향과청 정도는 조금 먹어줄 수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나에겐 새로운 과일청이 찾아올 예정이다. 계획에 없던 과일청인데, 아무래도 생일 선물인 모양이다. 심한 감기로 인해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을 때 받은 건데,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 배송지를 입력해서, 충분히 스스로 과일청을 타 마실 수 있고 어느 정도 일상생활이 가능한 시점에 받게 될 것 같다. 지금은 어느 정도 움직일 수는 있지만 결국 다시 드러눕게 되는 상태다. 활동적인 건 잘 못 할 것 같고, 숨을 깊게 쉬려고 하면 기침이 나온다. 요놈의 감기는 얼마나 더 지속되려나.


하여간 냉장고에 들어있는 양만 보면 청을 물처럼 마셔도 될 수준이다. 물론 그랬다가는 당분을 엄청나게 과다 섭취하게 되어 버리겠지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쓰며 살기엔 좀 벅찬 것 같기도 하고. 이미 아무 때나 주머니에서 양갱을 꺼내 먹고 다니는 시점에서 당분은 많이 섭취하고 있으니 이제 와서 신경 쓰는 척하는 것도 좀 그렇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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